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소설 <어쩌다 이런 가족>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솔직함을 넘어 발칙하기까지 한 소설 <어쩌다 이런 가족>. 웬만한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살 만한 금수저 가족에게 벌어진 에피소드를 통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성찰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책의 뒤표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모든 가족은 막장을 겪는다. 이 가족은 조금 더 막장이었을 뿐!' 대체 어떤 막장이기에? 타인의 막장을 구경하는 재미는 쏠쏠하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에서 막장의 요소를 결코 빼놓지 않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소설 속 가족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하지만 가족애가 없는 구성원들이다. 각자의 개성이 너무나 다르지만, 싸움조차 없을 정도로 적막이 흐르는 집안. '가화만사성'이라는 가훈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들의 실생활은 그것과 정반대다. 각자 방문을 걸어잠근 채, 개인의 일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그들이다. 그러던 어느날, 적막을 깨는 '큰 사건'이 발생한다. 고상하고 우아한, 평소 '마더 테레사'라는 별명으로 불려지던 첫째딸이 섹스동영상의 주인공이 된 것. 사회적 명예를 중시해오던 가풍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순간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적막이 흐르던, 서로에게 일체 간섭일랑 하지 않았던 가족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각자 이 사건을 해결해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물론, 고군분투하는 궁극적 이유는 개인의 목적달성이지만 말이다. 이 사건을 탓해야 할지, 옹호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결국 최악의 상황은 최고의 결론으로 변모한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던 집안은 소란으로 인해 기분좋은 소음이 있는, 진짜 가족들이 살아가고 있는 '가정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


작가는, 서로를 미워하는 감정이 관계 회복을 위한 씨앗이라고 말한다. 아이러니컬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은 무관심이다.


'화가 나고 슬프고 적어도 그 사람이 원망스럽다는 감정이 든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상대를 외면하고 현실을 회피하면 그 틈새로 적막이 흘러들어온다. 적막은 관계를 잠식시키고 서로를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감정이 어떤 형태로든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소리를 내야만 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금 느낀 것은, 모든 개인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있다는 점이다. 타인의 삶을 개인의 잣대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 우리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사랑을 다룬 작품들을 접할 때면(사실, 사랑이 배제된 작품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늘 느끼는 점! 메시지(결론)가 구태의연하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사랑은 인간사에서 결코 빠져서는 안 될, 보편적인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사랑의 가치. 반복되는 메시지임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같은 작품들을 되풀이해 접하는 이유는, 사랑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인 삶의 형태들이 모두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비거 스플래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