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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몽>


영화 <비몽>은 판타지를 현실화시켰다. 영화 속 진과 란은 꿈으로 엮여있다. 진이 꿈을 꾸면, 란은 몽유병 환자처럼 그 꿈을 실행하는 식이다. 진은 자신을 떠난 여자를 잊지 못해 꿈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반면, 란은 자신이 버린 남자를 경멸한다. 둘은 헤어진 연인을 두고 엮인 듯 보이지만, 그들에 대한 감정은 상이하다. 그래서 각자의 행위는 바라던 바와 다르게 흘러간다. 가령, 진이 꿈에서 연인을 찾아가면 란이 실제로 연인을 찾아가기기 때문이다. 란의 진실된 마음은 옛 연인에 대한 경멸이지만, 행위는 진의 꿈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꿈과 실체의 어긋남. 이 설정이 <비몽>이 지닌 특이성이다.


이들의 고민을 들어준 몽유병 치료사는 말한다. 둘 중 한 명이 행복하면 다른 한 명은 불행에 빠진다고.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면 된다'고 진단 내린다. 하지만 둘은 거절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심각한 상황 때문에 둘은 '함께 지내기'로 결심한다. 잠은 자야하기에, 한 명이 잘 때 다른 한 명은 깨어있기로 약속한다. 떨어져 있으면, 어떤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둘은 수갑으로 서로를 채운다.


시간이 흐르면서, 꿈의 실체가 드러난다. 진과 란은 꿈에서 각자의 연인을 만난다. 그들은, 미처 몰랐던 연인의 행각과 마음을 알게 된다. 진과 란은 각자 연인의 모습을 닮아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진과 란의 상징이다.


먼저, 진과 란은 남성과 여성. 즉 다른 성을 상징한다. 나아가, 반대되는 모든 것들의 상징이다. 꿈과 현실, 낮과 밤, 밝음과 어둠, 백과 흑, 가해와 피해 등 모든 반대의 표상이다. 진이 옛 연인에 대해 사랑을 갈망했지만, 란은 분노와 경멸을 표현한 것이 극명한 표현이다. 나아가 이는 삶과 죽음으로 귀결된다. 감독은 이 끊이지 않는 갈등의 해결 방법으로 자살(죽음)을 선택한다. 그로 인해 구원과 새로운 탄생을 희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꾼다. 환상이 있지만 그것이 현실로 가닿는다 하더라도 온전하게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이 영화의 제목 '슬픈 꿈(비몽)'처럼, 우리가 어떠한 꿈을 꾼다해도 그것과 대면하기란 어렵다.


우리는 꿈에서 최악의 살인마가 되기도 하고, 세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꿈은 가장 확실한 자유의 장소다. 어쩌면 영화 전체가 꿈(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비록 <비몽>의 결말은 죽음으로 마무리되지만,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꿈의 장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비처럼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것. 하지만 동시에 희망의 원동력이기도 한 것이 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나은 현실을 살아갈 수 있을까? 감독이 늘 강조해오던 것처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뒤섞일 수 없는 남성과 여성, 낮과 밤 등 대립되는 모든 것들도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남녀는 사랑해야 하고, 낮이 있기에 밤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조화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몽유병 치료사가 말했듯,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더 좋은 현실의 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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