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 해변을 찾는 이유


요즘 읽는 중인 책 <휴가지에서 읽는 철학책> 속에서 감명받았던 문단들을 옮겨본다.

휴가철(비단 그때가 아니어도)에 내가 해변을 찾는 이유를 잘 반영하고 있는 글이다.

더하여, 해변이 사유에 도움을 주는 이유이자 그들의 장점도 포함하고 있다.




아침 햇살이 해변의 한 카페 테라스에서 노닌다. 사물들은 꼼짝 않은 채 잠재적 상태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주변의 삶은 느릿해진 듯하고, 느린 삶이 쏟아내는 음악소리는 잦아든 듯하다. 모든 것이 고요하게 정지되어 있고, 파랗다. 우리는 마침내 텅 비고 평온하다고 느낀다.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으며 어설프다고도 느낀다. 시간은 우리 앞에 끝없이 펼쳐진다. 시간은 마치 마음처럼, 입처럼 열린다. '현재'라는 순간이 주는 현기증. - 72

일반적으로 문화, 생활방식, 사회계층, 직업 등에 의해 산출되는 일련의 확신은 우리의 사유를 단단히 붙들어 맨다.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비전은 지속적인 사유의 공급에 의해 '틀'이 형성된다. 따라서 습관적인 기준 체계를 잠시 접어두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는 것은 유익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하나의 무지가 고개를 내민다. 세상에 대해서 뭔가 알고 있다는 확신이 무너지는 것이다. 파도는 내면의 만리장성 같은 벽과 지하실 같은 구조물을 쓸어버린다. 그와 동시에, 감각이며 욕망, 사유도 파도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버린다. 우리에게는 이제 직업도 사회적 지위도 없다. 살아온 내력도, 이름도, 얼굴도 어디론가 쓸려갔다. 신분증도 잃어버렸다. 자아도 없고 나도 없다. 더 이상 할 말도 없다. 우리의 정신은 하늘처럼 파랗다. 우리는 영혼으 가벼워지고, 텅 비었으며, 고요하고, 평온해졌다고 느낀다. 이렇듯 대대적인 세뇌 덕분에 우리는 사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되돌려받는다. - 64. 65


현재는 살기 위해 주어진 시간이다. 우리는 해변에서 보내는 이 아침처럼, 유유자적한 시간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 같은 이 아침처럼, 그것이 당장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현재의 효용성'을 발견하게 된다. 무용성과 부조리 속에 정지된 이 순간, 목적도 의미도 없는 이 순간은 우리에게 사유와 감각, 감정, 행동 등으로 채워야 할 공백을 내민다. -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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