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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따코 Dec 22. 2020

흩어져 있다

나는 똘똘 뭉쳐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체구가 작은 만큼 그 안에 무한에 가까운 것들이 집약되어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조차 흩어져버린 지 오래임을 문득 실감한다. 오랫동안 하드에 묵혀둔 파일들이 소리 소문 없이 유실되듯, 내 안의 가능성으로 빛나던 것들이 꺼내 열어보지 않은 동안 유실되었다. 휴지통도 뒤져보지만, 채우기보단 비우는 것에 바지런했는지, 텅 비어있다. 나를 채우던 작고 소중한 것들이 어느 쓸데없고, 나쁜 것들에 섞여 비워져 버렸는지 모르는 일이다.


나는 흩어져 있다. 어디에 머물지 못하며, 무엇에 집중하지 못하고,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나는 한 곳으로 모이지 못하고, 이곳저곳, 머리카락이 그득한 신발장에, 지루함만 가득한 일터에, 플라스틱 용기의 천국 같은 대형마트에, 교체된 어릴 적 이불에, 누군가의 기억에, 누군가의 오해에 흩어져있다.


나는 어느 곳에 있는 내가 진짜인지 모르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뭉쳐내야 할지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얀 점토처럼 말랑거리고, 쉽게 뭉쳐지던 나는, 어느새 바싹 마른 모래처럼, 물기 한 방울 없이, 아무리 둥글게 뭉쳐보려 주먹을 움켜쥐어도 자꾸만 어딘가로 새어나간다. 손을 움켜쥘수록 애먼 손바닥만 아려오는, 엄한 곳이 아프고 엄한 데서 화가 나는 뜬금없는 상태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주제가 있어야 한다. 열심히 늘어놓은 곁가지들, 복선, 감정들이 결국 하나로 모아지는 것, 그것을 주제라 한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메시지. 내가 말하고 싶은 단 한 줄의 문장. 주제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늘 나를 따라다닌다. 주제가 없는 사람을 대하는 것은 공허하고, 지루하다. 남에게 쉽게 내린 판단은 어김없이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가 되어 돌아온다.


편편한 자판 위에 내가 아는 자음과 모음들이 흩어져있다. 그 위에 내가 가진 열 개의 손가락이 흩어진다. 엔터도 쳤다가, 스페이스키, 쉬프트키도 눌렀다 이리저리 분주하다. 깜빡이는 커서 위로 입력되는 글자들은 그렇게 한 음절이 되고, 한 단어가 되며, 한 문장이 된다. 쓰다 보면, 커서 왼쪽으로 밀려 나오는 글자들이 보기 좋아서, 쓰다 보면, 춤을 추듯 나부끼는 내 손이 보기 좋아서, 쓰다 보면, 지문 위로 전해지는 전자기기의 열기가 좋아서, 나는 주제도 없는 글을 쓴다. 주제도 모르고 글을 쓴다.


글을 쓰며 명확해지는 건, 글을 쓰는 일은 내게 무언가가 모아지는 일이며, 무언가가 완성되는 일이라는 것. 그 행위에 위로받고, 빈 페이지가 활자로 채워져 나가는 것을 보며, 내 안의 빈 곳도 조금씩 채워지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는 것. 쓰다 보면, 내가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는 것이다.


내 세상의 모든 것이 흩어진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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