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땅따코 Apr 26. 2021

할아버지의 지갑

옷 가게에서 일을 하다 보면

한 할아버지가 가게에 불쑥 들어와 한참 전에 이월된 반팔 티셔츠 하날 고른다. 계산대에 서 지갑 속 빳빳한 만원 2장을 꺼낸다. 이만 원을 재빨리 돈통에 넣고 거슬러진 백 원을 건네려는데,  당신의 지갑 속 사진을 대뜸 내민다.


가장자리가 하얗게 바랜, 어린 여자 아이가 청색 벙거지를 쓰고 청색 멜빵을 메고 싱긋 웃고 있는 사진. 손녀란다. 사진 속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이제 대학생이라고, 큰 놈도 있는데 손자는 23살이라고, 지금은 20대인 손녀의 5살 적 사진을 예쁘지 않냐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할아버지.

아마도 그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를 못 본 지 꽤 되었을 것이다. 가까이서 자주 보고 만질 수 있는 손자 손녀였다면, 그렇게 사진이 닳도록 보고 또 보진 않았을 테니까. 지금도 예쁠지 아닐지 모를 23살의 얼굴도 지갑에 한 장쯤 들어있었을 테니까.

나는 황당했다. 10년도 더 된 사진을 처음 만난 가게 점원에게 마치 어제 찍은 사진인 것처럼 보여준다는 것이. 사진을 보자마자 "어머 너무 귀엽네요"하고 친 맞장구가 괜히 머쓱했다. 지금은 귀엽지 않을 ㄱ...


가끔은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의 눈에 비치는 나는 어떨까 생각해본다. 털 날 데 다 나고, 목소리가 변하고, 눈높이가 높아져도 그들의 눈엔 나는 아직도 겨우 아장거리거나 옹알거리는 것처럼 보이려나. 어른 태가 난다, 다 컸다 하다가도 곧장 말도 안 되는 깔맞춤룩으로 발랄한 표정과 포즈를 지어버리는 어린아이로 돌아와 버리는 것인가, 하고.

예쁜 아이가 커서 예쁜 어른이 될 리 없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나 어여쁜 아이로 여겨주는 건 어디서부터 시작된 망각일까. 아님 그것을 가족애,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애가 닳는 내 어여쁜 손자 손녀들,
많이 팔아요. 많이 벌어요.
하고 가신 할아버지 손님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땡큐 포 콜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