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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아저씨 Aug 01. 2021

평범함이 저지르는 끔찍한 오류

아....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다.

군대에 가면 딱 중간만 하라는 명언이 있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이 말은 너무 잘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너무 뒤처지지도 말라는 뜻이다. 군대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 또는 학교에서도 이런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과연 중간만큼 혹은 딱 적당한만큼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안타깝게도 결론은 불가능하다.


중간이란 인위적인 기준으로 시작과 끝 그리고 많음과 적음에서 두지점의 정가운데를 의미한다. 


그런데 중간만큼이라는 기준을 이해하는 주체와 그것을 평가하는 사람은 같지 않고 따라서 기준 역시도 변한다. 

군대에선 튀면 안 된다. - Pixabay로부터 입수된 WikiImages님의 이미지입니다.


간단한 예로 '나는 중산층인가?'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혹은 '그렇다'라고 답 할 것이다. 하지만, 제3자의 입장이나 각기 다른 국가의 기준에서 대체로 일치하지 않는다. 

(소득을 기준으로 잡더라도 우리나라의 중산층이 저소득 국가의 중산층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평범하다는 뜻은 무엇일까? 국어사전 상의 뜻풀이는 다음과 같다. 


'뛰어나거나 색다른 점이 없이 보통이다.'


색다른 점이 없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이란 색채가 없는 무색의 사람이란 말인가? 좀 더 깊이 해석한 내용을 찾아보니 이런 내용도 있다.


'가장 많이 분포한 특정값에 가까운 것'


위의 사전적 용어를 빌려 해석하자면, 평범한 사람이란 나와 내 주변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여러분 주변을 둘러보라.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의 평균값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당신이 평범하다고 생각된다면 말이다.


평소 고단함과 일상에 지쳐 그저 평범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평범함이란 생각하는 것처럼 아름답거나,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평범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의미로 평범은 나의 색을 없애는 행위에 가깝다. '철저하게 다수와 동화되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학교에서 받는 일률적인 주입식 교육의 연장선인 셈이다. 만약 스스로를 고유하고 개성 있는 존재라 믿는다면 당신은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Andrew Martin님의 이미지입니다.

평범함은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사회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집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상대를 찾는다. 이런 과정에서 나와 상대방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무리에 속함을 증명한다. 그것이 지금 현대사회의 우리가 평범해지길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집단내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또한 매우 강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일단 같은 무리라고 인식한 다음에는 나의 존재를 부각하려 노력한다. 


이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장이 명품시장이다. 비싼고 값져 보이는 물건을 통해 본인의 가치를 입증하고, 외모를 꾸며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투영시킨다.


이런 행위는 나와 상대방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된다. 어찌 보면 매우 상반된 두 가지의 욕망이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셈이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StockSnap님의 이미지입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평범은 다수의 객체를 일률적인 기준에 통합하는 과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인류 집단의 단위가 커지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표준성과 통일성을 요구받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로마의 시민권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여권(PASSPORT) 미터법 그리고 자동차 신호 체계 등이 있다. 이런 통일된 기준은 현대 사회를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으로 간주된다. 국가 단위에서 이런 통일성은 강력한 통치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으며 효과적인 관리를 위해서도 필수적 요소이다.


흑백논리에 의한 통합과정은 예상치도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2차 대전의 나치 독일은 민족주의를 표방한 강력한 통일정책으로 소위 상위 표준화된 평범한 사회를 꿈꾸며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사실 나치즘(Nationalsozialismus 나치오날조치알리스무스, 독일어 발음: [nat͡si̯oˈnaːlzot͡si̯aˌlɪsmʊs])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주의라는 명분과 매우 이상적인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역시도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아주 이상적인 이론이었다. 


안타깝게도 위의 두 가지 사례는 역사 속의 어두운 기록만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간의 동질감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범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모호한 기준의 경계성 때문에 때로는 아주 처참한 역사적 과오를 범하기도 한다. 


Pixabay로부터 입수된 WikimediaImages님의 이미지입니다.

그렇다면 평범해지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잘못된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우리가 평범해지고 싶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회화 과정이라 생각한다.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평범함이 필요하다. 만약 구성원 전부가 공통점 하나 없는 독특한 존재들이라면 아마도 그 무리는 금방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생물학 박사이자 전 국립생태원장을 지낸 최재천 교수는 "다양성을 잃어버린 생태계는 자정 작용을 잃어버리고 결국은 파괴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나는 우리 사회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단지 평범한 사람으로 가득 찬 사회는 다양성이라는 기회와 가능성을 포기한 채 단 한 번의 위기에도 무너져버릴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내가 가진 평범함 위에 상대방에 대한 다름을 인정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개성을 부각하고 싶어 한다. 반대로 상대를 판단할 때는 개성보다는 나와 어떤 점이 비슷한가를 먼저 확인하려고 한다. 반대로 상대방의 개성을 존중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더욱 바람직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상호 조율을 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개선해가는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한 사람이 평생을 오로지 독립된 개별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평균점인 완전한 평범함 역시도 불가능하다. 


대한민국이라는 치열한 경쟁사회에 지쳐 그저 평범한 일상을 꿈꾸는 나에게 말하고 싶다. 내가 평범해지고 싶은 이유는 그저 여러분의 공동체에 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우리 사회에 잘 속해있는 일원이다. 이제는 주변 사람들의 개성 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나 역시도 상대방에게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없고 배척당할 것이다. 우리는 갈등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이런 성장통 속에서 평범함과 개성을 동시에 발휘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할 것이다. 평범함과 개성을 동시에 갖는 것은 멋진 인생을 설계하는데 큰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나와 당신은 각자의 개성을 가진
소중한 존재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평범한 사회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메인사진 : Pixabay로부터 입수된 PublicDomainPictures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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