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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마음챙김 수업

지금은 이대로 충분하다.

모든 것에 처음이 있다. 첫 번째 카메라, 첫 출근, 첫 데이트, 첫째 아들, 큰맘 먹고 처음으로 간 가족 해외여행. ‘처음’이란 말은 항상 설렌다. ‘설마’하며 기대한 것과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걱정, 아니면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에 대해 ‘어쩌면'하는 기대감, 이것들이 서로 뒤엉켜 있는 것이 ‘설렘’ 일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들뜨고 생각은 세포가 분화하듯 두 배 세 배 자꾸만 많아진다.

미지의 정글 속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인디아나 존스 박사. 수없이 보았던 가슴 설레는 장면이다. 나는 항상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하고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는 듯한 느낌으로 영화 속에 빠져들곤 했다. 망설임 없는 대담한 걸음걸이를 나는 늘 동경했다.


그러나, 나의 시작은 항상 막연했고 늘 조심스러웠다.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 관심을 가졌을 법한 DSLR 카메라, 게다가 풀 프레임 카메라. 사진을 좋아하는 나와는 필연적인 만남일 수밖에 없다. 탁 트이는 넓은 화각 그리고 눈가의 옅은 미소까지 잡아내는 쨍함. 전자상가에서 카메라를 테스트해 볼 때면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시간은 훌쩍 흘러가버린다. 그렇게 매장을 반 년동안 들락날락 거리고, 인터넷 후기를 읽어보는 동안 10개월이 지나갔다. 처음 매장을 방문한 날, 내 손으로 직접 느껴본 바로 그때 이미 마음은 결정했지만, 나의 마음을 재 확인 하고 또 후회하지 않을 결심까지 하는 조심스러운 열 달이 지나간 것이다. 하나의 생명이 세상에 나오는 시간 동안,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산 것이다.


10년이 더 지났지만 나의 조심스러움에는 변함이 없다.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지도 모른 채 반복된다. MBSR level 1 공식 지도자의 마지막 관문인 지도자 향상 집중 과정 때였다. 90여분 간의 MBSR 소개 세션을 직접 진행해야 하는데, 참석자 모집부터 강의 준비와 진행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해내야 하는 도전적인 미션이다. 사내 강의를 진행하는 동안 참석자의 주의를 모으기 위해 짧은 명상을 진행을 해오고 있었지만, 90분의 시간을 오롯이 마음챙김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회사 동료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특징을 반영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준비가 필요했다. 자료 화면을 기반으로 설명하는 것이 참석자들에게 더 익숙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늘 하던 사내 강의하던 습관처럼 접근하게 되었다. 주욕 목적은 참석자로 하여금 마음챙김 명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것과 동시에, 나로서는 마음챙김 명상을 설명을 할 수 있도록 두뇌 회로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안희영 소장님과 Jon Kabat-zinn, Jack Kornfield의 강의 영상을 통해 위대한 지도자들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최소한 그들의 반이라도 따라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닐까? 어차피 성공에는 항상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그 이유의 일부를 내가 재현해 낼 수만 있다면 참석자들의 기대에도 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챙김 명상은 무엇이며, 이점과 과학적 근거, 흔한 오해들을 알려주면서도 마음챙김의 핵심을 적절하게 전달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설명보다는 실습을 통해 참석자들의 경험을 이끌어야 하며, 참석자의 경험 발표에 덧데어 마음챙김의 핵심을 전달한다. 거기에 더해서, 마음챙김 지도자의 개인적인 경험담으로 신뢰를 높여줘야 한다.. 다양한 비유적 이야기들, 또는 유머러스한 순간들까지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재미가 없으면 결코 참석자들의 주의를 유지할 수가 없는 법이다. 약장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약에 대한 관심까지는 이끌어 내야만 하는 사명감은 필수인 것이다.


어떠한 내용을 넣을 것인지 고민하며 하얀 백지위에 떠오르는 단어들이 두서없이 앉힌다. 스토리 라인을 짜고, 거기에 맞는 사진들과 유명한 표현들을 모아 본다. 유명 인사들의 실제 경험담을 모으고, 과학적 근거를 위해 해당 논문까지 찾아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이렇게 또 하나의 배움이 일어나는구나. 절박함이 없이, 아니, 절대적인 필요가 없는 배움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수많은 수학 공식들과 미적분, 나는 결코 한 번이라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시험 문제는 잘 풀어냈지만, 진짜 삶의 문제에 그런 수학 공식들이 적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어쩌다 보니 슬라이드가 100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반복되는 메시지, 그리고, 나만이 좋아할 만한 그림들. 어느덧 나를 위한 자료들이 모아진 것이다. 명상을 할 때 ‘온 존재’를 걸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 삶의 모든 일에 온 존재를 걸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에게 얻어지는 것이 있다.


이젠 덜어낼 차례이다. 더 이상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참석자들의 시각에서 자료를 수정하며 고민한다. 자연스러운 연결을 위해 그림들의 순서를 바꾸고 또 지워낸다. 창조성의 원리 중의 하나는 확산과 수렴이다. 많이 만들어낸 후에 덜어는 작업은 필수인 것이다. 허나 미련이 묻어 있는 장표(슬라이드)들이 쉽게 사라질 리 없다. 결국, 70여 장에서 마무리된다. 어떤 부분에서는 빠르게 몇 장을 훑어 지나가고, 또 다른 슬라이드에서는 한 참을 머물리라. 어떤 슬라이드는 숨겨두고 필요할 때에 꺼내야 하고, 반드시 전달해야 하는 내용은 슬라이드 노트에 기록해 둔다.


드디어 90분짜리 마음챙김 소개 세션에 대한 이메일 초대장을 보낸다. 주요 대상자는 내 주변의 사람들, 즉 나와 늘 마주하던 사람들 중에서 명상에 관심이 있을 법한 사람들에게 먼저 초대장을 보냈다. 심지어 일부 동료들에게는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얼추 10여 명에게 초대장을 보낸 후 뿌듯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들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결국, 조바심이 난다. 채팅으로 한 명 한 명 이야기를 걸어본다. 3분의 1은 세션 당일에 회식이 있어서 참석할 수 없다고 한다. 나를 위해 참석해 주려는 모습들이었고, 자신도 어쩔 수 없어 미안해하는 모습이다. 그리 싫지만은 않았지만, 나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반응이라 적잖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리더십 강의를 진행하면서 내가 자주 강조하던 말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너무 사랑하지 말라, 그리고, 반드시 상대방이 좋아할 것이라고 믿지 말라. 그것이 제일 큰 오해이고 그로 인해서 많은 문제들이 생겨난다. 이 말의 힘을 이번에 여실히 경험하게 되었다. 강사로서 나에 대한 기대와 강의 주제에 대한 관심이 충분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덜컥 겁이 난다. 이러다가 두 명 정도만 참석할까 봐 적잖이 걱정도 된다. 강의 시작 당일까지도 주변 동료들에게 일일이 이야기를 하면서 겨우 예닐곱 명의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모을 때보다는 그나마 좋은 여건인 것이다. 향후 나의 모습을 비춰본다면 분명 이번의 예닐곱 분들은 구세주에 속할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 시작할 수 있는 기회와 용기를 북돋아준 분들이기에.


강의 당일 저녁 7시 30분. 회사 업무가 끝나고 식사도 마칠 시간. 어떤 분들은 집에서, 또 어떤 분들은 산책 중에, 그리고 어떤 분들은 회사에서 참석을 하게 된다. 구름이 가득한 날씨, 행여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길까 봐 걱정을 하면서 어서 시작시간이 되기를 기다린다. 슬라이드의 순서를 더 바꿔볼까 하며 한참 고민하다 보니 얼추 시작시간이 다 되어 간다. 더 이상은 어쩔 수 없게 된 것이 좋았다. 이젠 내 안에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도록 믿어줄 수밖에 없다. 곧 모험이 시작된다. 이렇게 배움이 생겨난다. 머리로 하나하나 외워서 생기는 배움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 속에서 그것들은 내 안에서 서로 얽키고설키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내 것이 될 예정이다.


한 명 두 명 로그인하면서 온라인 강의실로 들어온다. 일곱 명이나 되었다. 기뻤다. 나를 믿고 또는 나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참석을 해 주신 분들이지만, 이 분들에게는 8주간의 교육 과정으로 제일 먼저 보답해 주리라. 서로 다른 종교적 견해와 명상에 대한 관심에도 많은 차이가 보인다. 일단은 준비한 대로 진행하면서 참석자들을 계속 살펴보기로 한다. 보통 때의 사내 강의에서 보여주던 활발한 대화와 진지함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이름을 부르고 '느낌이 어땠나요' '어떤 것이 달랐나요' 하며 강제로 대화를 일으킨다. 불편함이 묻어나는 진행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라도 대화와 공유가 일어나야 하고, 그래야 나도 더 배울 수가 있는 것이다.


쓸데없이 설명이 길어졌다가 짧아졌다 한다. 조급해하는 마음, 애매모호한 설명, 반복되는 표현들, 빠트린 설명들.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하는 설명. 많이 미안해진다. 이러다가 제 때 끝내지 못하겠는데. 내 안의 걱정하는 생각들도 알아차린다. 참 대단한 진보다. 처음 입문하던 일 년 전과 달리 이제는 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급한 마음을 알고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틈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반응과 자극 사이의 아주 작은 공간. 비록 보려고 애쓸 때에만 보이지만, 그 공간을 보고 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잘 된 것이다. 나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참석자들은 각자가 필요한 만큼을 얻어갈 것이다. 내가 더 나눠주려 애쓴들 그들이 필요치 않다면 어차피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항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들과 나는 결국 서로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뿐이다. 어떤 것을 강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내가 그저 부드럽고 친절하게 권해볼 뿐이다.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 나의 이야기다 보니 풍부한 수행 경험이 더욱 절실해진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있다. 오늘 강의가 마지막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반복할 것이고, 그런 반복들 속에서 8주간의 일반 과정도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나의 미미한 시작을 시작한다.


내용이 긴 슬라이드는 건너뛰고 대신 명상 실습에 좀 더 신경을 썼다. 몸을 편안하게 하는 시간, 손을 느껴보는 시간, 생각을 세어보는 시간, 그리고, 정좌명상. 명상 안내를 하면서 나도 명상을 한다. 일 년 전에 내가 느꼈던 그러한 어려움, 이를테면, 생각이 달아남, 생각으로 빠져듬, 잠이 오는 순간들, 이 모든 것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른 분들의 상황도 공유하여 일반화시키고, 또 응원을 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너무 힘주어 애쓰지 말라고. 대신 우리 자신에게 먼저 친절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준다. 비록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나의 모습은 그저 대견하기고 또 뿌듯하다. 오늘은 실수를 하는 날이다. 나는 실수하지만, 참석자들은 결코 실수가 없다. 오늘 일어나는 모든 것이 결국 교육의 일부가 된다.


다음 날 아침,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메일을 보낸다. 어저께 못다 한 메시지를 넣고 각자의 새로운 시작을 종용해 본다. 돌아온 두 개의 회신. 고맙다는 말과 나를 응원하는 말들이다. 두 명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나는 벌써 30% 정도 성공한 것이다. 꽤나 괜찮은 출발이다. 욕심내지 않고 차근차근 그렇게 내 인생의 나머지를 걸어가리라. 어깨 위에 괜한 짐을 올릴 필요는 없다. 간소한 봇짐으로 길을 떠나듯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작은 봇짐이기에 쉽게 채울 수 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고 항상 기뻐할 수 있다.


다음 달에 진행할 강의를 준비해야 한다. 기다려진다. 실수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말이 착하고 가슴에 감긴다. 수정하고 덜어내야 할 장표가 많지만, 아직은 그대로 두어 보기로 한다. 섣부른 생각에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다. 잘 익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늘 해 오던 방식이 아닌가? 꽤나 조심스러운 방식. 고민하고 서서히 준비하는 방식.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오늘이 온 것이다. 비록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숨을 쉬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잘못된 것보다 잘 된 것이 더 많은 법이다. 단지 그것을 보지 않으려 했을 뿐.


그렇다, 참 좋은 출발이다. 지금은 이대로 충분하다.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기에 감사하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된다.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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