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향한 수다
가족이 둘러앉은 저녁 식탁. 서로 다른 입맛들은 각자의 모서리에 앉아 혼밥을 한다. 눈과 귀는 이미 휴대폰에 빼앗겼고 내버려진 손과 입은 무의미한 작업만을 반복할 뿐이다. 악당의 무자비한 공격에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한 지구 방위 수비대. 이제는 합체조차 쉽지 않다. 처참한 패배를 직감한 그의 마음은 쪼그라들어 형편없어진다. 세상에 홀로 남겨지면 이런 느낌일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처절함이 아무리 해도 입 밖으로 나가질 않는다. 전해지지 않을 간절함. 수비대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미안함에 그의 왼쪽 가슴이 투욱 하고 무겁게 내려앉는다. 벌써 몇 번째였던가.
불안함과 조바심으로 그의 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다.
'중간고사는 어땠니?' '요즘 학원에서는 어떤 곡을 연습하니?' '그림 대회는 언제지?' '준비하던 시험은 언제예요?'
밀린 월세를 독촉하듯 뱉어낸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도 단답형이다. 식탁 밑에 놓인 맨 발등 위로 싸한 공기가 지나간다. 발이 창백해진다.
고민이 홀로 길어지는 사이에 대화는 '손흥민'과 '토트넘', 그리고, '축구선수 헤어스타일' '다운파마'를 넘어 서로 부럽다는 이야기로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놀란 그의 눈동자에 식탁 전체가 담기어 반짝이고, 저녁 음식 위로 대화들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서서히 공기가 데워지고 있었다. 합체 성공이다. 홀로 뒤처진 그는 저 멀리 달아난 대화를 따라잡으려 온몸의 세포를 총 동원한다.
사춘기 아이들의 첫 번째 고민거리는 외모다. 옷, 여드름, 로션, 샴푸, 미용실이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중 제일 까다로운 것이 헤어스타일인가 보다. 머리가 힘이 없어 죽는다며 동생의 빳빳한 머리를 부러워하면, 오히려 자기 머리는 너무 빳빳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른다며 부드러운 머릿결을 가진 형의 머리를 부러워한다. 흘려들으면 칭찬일 테지만 이 녀석들은 철저히 자기 불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미용실을 다녀올 때마다 울상을 짓던 이 녀석들의 표정이 오늘의 대화와 겹쳐진다. 눈동자만큼이나 새까만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첫째, 여린 솜털을 가지고 태어나 걸을 때 즈음엔 차롬하고 짙은 갈색 머리를 가졌던 둘째, 그리고, 이 둘의 머릿결이 겹쳐져 반들반들했던 셋째.
성장하면서 또 많이들 변할 테지만 이 녀석들의 머릿결은 기억 속에 늘 항상 선명히 남아있다.
아이들의 이야기와 기억들과 궁금증 사이를 오가는 동안 머리카락과 관련된 생각들이 부스스 일어난다.
이와 씨가리
어릴 때는 머리가 참 가려웠다. 물이 귀한 시골이라 자주 씻지 않은 탓이겠지만, 머리에 이가 참 많았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가려워 괜히 긁어 본다.
할 일이 부쩍 줄어든 겨울 농촌에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참빗을 팔러 다니던 방물장사 아주머니가 계셨고, 한 해를 걸러 어머니는 참빗을 사시곤 했다. 어느 볕 좋은 날 새로 산 참빗을 들고 마루 끝에 앉아 머리를 빗어 내린다. 그러면, 하얀 녀석들이 마당으로 후두두 떨어지고 일부는 촘촘한 참빗 빗살 사이에 끼어 남아 있었다. 손톱으로 빗살을 한 번 긁어 내리면, 참빗은 ‘차르릉’ 맑은 소리를 내며 빗살 사이에 있던 이들을 마당으로 튕겨낸다. 머리가 가려운 날이면 더욱더 많이 나오는 하얀 녀석들. 참빗의 강력한 힘과 함께 내 마음도 우쭐해진다. 더 나은 내가 된 듯한 뿌듯함.
그런 후 방으로 들어온다. 한지문을 통과해 따뜻한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고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눕는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으며 아직 남아 있는 이와 씨가리(서캐)를 잡아 낸다. 특히, 씨가리는 작기도 하려니와 머리에 착 달라붙어서 참빗으로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손끝과 손톱을 이용해서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을 훑어 내지 않고서는 답이 없다. 그러다 보면 30분이 훌쩍 흘러간다. 눈이 좋지 않으면 할 수 없고, 손가락이 거칠어도 힘들다. 노련한 어머니의 눈길과 손길을 피하지 못한 씨가리들은 투박한 엄지손톱 사이에서 '톡'하는 울림을 남기고 깨어져 죽어나간다. 눈을 감고 듣는 '톡, 톡'소리는 참 재미있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어머니의 따뜻한 무릎, 혹은 머리 여기저기를 지나간 손길의 시원한 여운이었을까. 아니면 어머니와 누나들이 나누던 이해하기 힘든 대화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내 스르르 잠이 들곤 했다.
간이 이발소
손에 재주를 가지고 태어나신 아버지는 지게나 학꼬(나무 상자), 심지어 겨울에 내가 타고 놀던 시게토(작은 썰매)까지 손수 만들어 주셨었는데, 군 생활 중에 이발병도 겸하셨던 듯하다. 사랑방 구석에는 신비로운 냄새를 풍기는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날카로운 머릿가위 하나, 두 개의 수동 바리깡(이발기), 양옆으로 다른 간격으로 난 머리빗, 면도용 칼, 면도용 거품솔, 면도용 칼을 날카롭게 갈 수 있는 오래된 가죽 띠, 책보처럼 생긴 얇은 이발용 앞치마, 바리깡용 기름 등이 서로 뒤엉켜 끌어안듯이 들어 있는 짙은 갈색의 신비로운 상자. 이것을 열면 옅은 기름 냄새와 비누 냄새, 그리고, 머리카락 냄새가 났다.
큰일을 앞둔 동네 남정네들은 모두 아버지를 다녀가셨다. 이른 아침이든 늦은 오후든 아버지는 상관치 않으셨다. 이발 때문에라도 우리 집은 늘 사람들이 끊이지 않던 그런 간이 이발소 같은 곳이었다. 그늘진 마당 한 구석에 등받이 없는 의자를 놓이고 늘 그랬던 것처럼 손님이 앉는다. 옅은 하늘색 책보 같은 미용포를 목 뒤로 둘러 빨래집게로 고정을 하고 나면 이발과 면도 준비가 된 것이다. 나의 역할은 작은 주발에 찬물을 떠다 놓는 것이다. 첫 번째 작업은 가죽띠를 사용하여 면도칼을 날카롭게 가는 작업이다. 두꺼운 아버지의 손길을 따라 고동색 낡은 가죽 띠 위에서 면도칼이 춤을 춘다. 햇빛인지 칼빛인지 내 눈앞에서는 은빛 춤 한판이 벌어지고 면도칼은 그 날카로운 위용을 서서히 드러낸다. 물을 적신 솔로 비누 거품을 내어 손님의 코밑과 턱밑 그리고 귀 앞까지 정성스레 바르고 나면 드디어 칼춤이 시작된다. 시퍼런 위세에 나는 잔뜩 쫄아서 숨을 감추지만, 아버지 손에 들린 면도칼은 하얀 눈밭을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경쾌하게 춤을 춘다. 피부에 상처 하나 내지 않고 수염만을 깔끔하게 베어내는 칼솜씨는 미스터리에 가깝다. 몇 해전 TV 프로그램에서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면도를 해야만 피부가 다치지 않고 매끄럽게 면도가 가능하다고 전문가가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그 시절 아버지는 45도를 잴 필요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고 계셨던 듯하다.
수동 이발기는 줄을 사용해서 주기적으로 날을 갈아주고 기름칠을 해야만 그 날카로움이 유지되지만 그래도 간혹 머리카락을 뽑거나 작은 상처가 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죄송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손님들은 항상 괜찮다며 웃으며 넘기셨다. 별일이 아닌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고수의 실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작업을 마무리하셨다.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은 마당비로 쓸어서 거름태미에 자연스럽게 모였다. 소일(작은 수고로움)에 대한 삯을 따로 받으셨는지는 궁금하지만,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두 분 사이에는 참 많은 대화들이 오고 갔다. 서당개가 풍월을 읊듯이, 이발하는 내내 옆에서 지켜보고 또 가끔은 도와주시던 어머니도 어느새 간단한 이발을 하실 수 있게 되었고, 어느덧 아버지의 머리를 어머니가 깎아 주고 계셨다.
우리 가족은 자연스럽게 아버지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모)범생이었던 나는 중학생 시절에도 아버지에게서 머리를 깎았다. 까까머리를 했어야 했던 중학생이기도 했지만, 늘 아버지에게서 머리를 깎던 익숙함에서 벗어나기가 더 어려웠다. 때로는 앞머리를 옆으로 살짝 넘기고 싶은 충동에 시내 이발소에서 깎고 싶어 이리저리 마음을 재기도 했지만, 어느덧 주말이 다가오고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에 가야만 하는 처지다 보니, 결국 머리는 아버지에게서 계속해서 깎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칠 때 즈음, 아버지는 오십 대로 접어드셨다. 그때 즈음에 이발에서 손을 놓으셨던 듯하다. 마을 앞을 지나는 버스 운행 횟수도 늘어나면서 읍내에 나가는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마을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읍내에서 이발을 하게 되었다.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만이 "머리 좀 깎아 줄 수 있겠는가?' 하시며 아버지에게 부탁하곤 하셨다. 물론, 이발뿐만 아니라 면도까지 포함된 아버지만이 할 수 있었던 마을 공헌 활동이었다.
뽀글뽀글 파마머리
고추 농사가 유난히 많던 우리 마을, 고추를 딸 때면 동네 아지매들은 으레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서로 품앗이를 하곤 했다. 멀리에서 바라보면 짙은 초록색 고추밭고랑 사이에서 둥글게 말려진 하얀 수건들만이 이리저리 옹기종기 움직이곤 했는데, 나는 용케도 어떤 수건이 어머니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손이 많이 가는 농사일 때문인지 하얀 수건 속 어머니는 늘 뽀글뽀글 머리였다. 아니 1980년대, 그 시절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뽀글뽀글 파마를 했었다. 특히 농촌에서는 얼마나 예쁜지 보다는 얼마나 오래 가는지가 더 중요했다.
농번기가 끝나는 늦가을 또는 큰일이나 명절을 앞두고 아지매들은 파마하러 미용실에 다 함께 모여서 가시곤 했다. 옹기종기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옆 마을 누가 결혼을 하는지, 고추금(값)은 얼마나 받았는지 이야기와 함께 그동안의 밀린 세상 이야기로 꽃을 피우셨을 것이다. 그날 오후 어머니 머리에서 나던 파마약 냄새는 왠지 모르게 도시의 세련됨이 묻어 있었다. 쪽진 머리에 비녀를 하시던 외할머니도 어느새 파마머리 대열에 합류하셨다. 희끗희끗 흰머리가 많으셨던 외할머니는 내가 결혼한 첫해, 돌아가실 때까지도 파마머리를 유지하셨다. 한 번 바꾼 머리는 쉽게 되돌려지지 않는다. 특히 파마머리는 그런 마력이 있다.
스트레이트와 곱슬
이십 대 후반이었다. 문득 머리를 길러 보고 싶어 미용실을 몇 달 동안 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머리가 길어지고 곱슬머리 본연의 자유분방한 물결들이 나타났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다. 머리를 쓸어 올리다. 머리띠를 하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해졌고 가슴속에 꼭 눌러 간직했던 로망을 '자유'를 맘껏 표출했다. 내친김에 곱슬머리의 로망인 '스트레이트 파마'에 도전했다. 옆머리가 딱 붙고, 앞머리는 차분하게 아래로 직선으로 내려온 스트레이트 머리. 멋질 것만 같던 나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어색하고 낯선 표정의 남성이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큰일 났다. 완전히 망했다. 하루가 지나고 며칠이 지나는 동안 머리를 감고 또 감아도 어색함은 씻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서히 창피함을 지나 좌절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곱슬머리는 고집이 세다고 했던가. 한 달이 지나며 곱슬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고 두 달이 가득 채워 지날 때 즈음에는 드디어 원래의 곱슬로 돌아왔다.
비슷한 또래가 많던 젊은 회사 환경이라 그런지 머리에 대해서도 참 관대했다. 긴 곱슬머리를 하고 기타를 치며 나는 다시 우쭐해졌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눈길들이 싫지만은 않았다. 머리를 묶을 정도로 길게 기르기엔 내 마음은 준비가 되지 않았던지, 머리카락이 뒷 목에 닿을 때 즈음에 나는 다시 짧게 깎았다. 미용사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을 많이 어색해하던 터라 성급하게 기르고 또 성급하게 머리를 잘랐다. 바람이 불고 또 지나가듯 그렇게 내 긴 머리도 지나갔다.
새치와 대머리
서른이 넘으면서 머리에 새치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옆머리가 조금 근질근질하기 시작하더니만 이내 여기저기 늘어나는 새치의 기세가 걱정스러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몇 가닥의 새치와 늘 함께해 왔기에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직접 뽑아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TV 드라마에서는 흰머리 하나에 100원이라고 아빠가 딸에게 말하는 따뜻한 새치였지만, 나에게는 숨기고 없애야 할 치부가 된 것이다. 서른 중반을 넘어가면서 새치 뽑는 것에도 싫증이 나고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뽑을 때의 따끔함 뿐만 아니라 이러다가 머리를 다 뽑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터무니없는 걱정이 성큼 다가왔다. 옆과 뒷 머리만 조금 남은 아버지를 닮아 형님들도 눈에 띄게 머리숱이 줄어들고 있었다. 나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명절이 되면 가족과 친지들은 나의 새치에 예의가 없다며 쏘아 부쳤고 나는 결국 염색까지 하게 되었다. 어떤 색으로 할지 고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검은색을 제외한 다른 색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마흔 즈음의 추석에는 염색마저도 귀찮아 멈췄다. 간단한 이유를 들어 귀찮음을 덮었다. 염색은 머리에 자극을 주고, 머리숱을 더 빠지게 하는 위험도 있다는 멋진 변명이었다. 대머리를 핑계로 다시 원래의 밝은 새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 해 설날에는 그 변화를 느낄 정도가 아니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추석이 될 즈음엔 벌써 머리의 사분의 일 정도가 하얗게 되어 이젠 그냥 모른 척할 수도 없었나 보다. 나름 논리적인 결정으로 보여 부모님도 크게 반대는 하지 않으셨으나, 놀리는 듯한 핀잔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친척 아재는 깜짝 놀라 걱정까지 하셨다.
“너는 막내인데 어떻게 머리가 제일 시었노?“
“김서방은 염색하면 더 젊어 보일 텐데.“
한 번은 작은 형님 친구들이 고향에서 모임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분의 머리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새치라는 말이 초라할 정도로 머리 전체가 하얗게 물들어 있었는데 탈색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분의 부드러운 미소 때문이었을까, 보는 이의 궁금증과 이질감과는 상관없이, 친구분들의 대화는 유난히도 자연스러웠다. 다름과 자연스러움이 하나 되는 친구들의 우정. 나는 용기를 얻었고 마음은 굳어졌다. 그렇게 나의 삶에서 인위적인 염색과의 완전한 이별을 했다.
협동이 필요한 긴 머리
오십이 다되어 다시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이십 대 때와의 차이라면 이제는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외모에 대한 작은 변화까지도 대화와 협상의 주제가 되었다. 어느 것 하나 아내의 동의와 허락이 필요한 시기로 접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아내는 정면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살짝 방향을 틀어주는 정도의 조정이랄까, 그리고 그런 조정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코로나와 함께 일 년 육아휴직을 하며 머리가 길기 시작했다. 처음엔 감염을 우려하여 미용실을 가지 않던 것이 어쩌다 보니 익숙해지게 되고 머리는 어느덧 귀를 덥어가고 있었다. 내친김에 좀 더 길러 보기로 했다. 이번엔 묶어 볼까도 생각하던 참이었다.
머리를 기를 때도 의구심과 회의감이 다가오는 시점이 있다. 입사 후 3개월, 6개월, 3년, 6년 등 3의 배수의 기간에 우리는 시험에 든다. 회사를 계속 다닐까 아니면 이직할까 하는 고민처럼, 머리를 기를 때도 우리는 시험에 든다. 첫 번째 시점은 바로 귀를 덮기 시작한 시점이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머리카락이 귀를 간지럽히는 느낌. 그냥 한 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 내내 그런 느낌이 있다. 귀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귓밥(귀지)이 많아져 밖으로 넘쳐 나오고 있지나 않은지. 시도 때도 없이 걱정이 찾아오면 바로 그때가 시험기간이다. 머리카락이 한 달에 평균 1~1.5cm 정도 자란다 하니, 약 3개월이 지나게 되면 3~5cm 정도 자라게 된다. 이 때는 주위 사람들도 의식하기 시작한다. 뭔가 덥수룩해 보이기도 하고 깔끔하지 않은 느낌도 들고, 심지어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우려 섞인 눈동자들도 마주하게 된다.
"김서방은 짧을 때가 더 잘 어울리던데, 웬만하면 짧게 하지?"
"혹시 무슨 일 있어요? 남자도 머리 바꾸면 일이 있다던데..."
이 시점에는 반드시 아내와 상의를 해야 한다. 어떤 미용실을 갈 것인지 정하고, 예약도 해야 한다. 아내도 고상한 옷차림으로 동반하여 나의 미용실 대변인이 된다. 나는 그저 점잖은 미소를 얼굴에 묻힌 채 잠자코 앉아서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머리를 길게 기르려고 하는데 옆머리를 좀 더 깔끔하게 하면서 기르고 싶어요."
"앞머리도 같이 기르실 거예요?"
옆머리와 뒷머리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는지, 나중에는 묶기도 할 것인지 꼼꼼히 물어봐 준다. 그리고, 곱슬끼가 있는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깔끔하게 되지는 않기에 파마를 하는 것이 좋다며 넌지시 세일즈 활동도 수반된다. 짧은 시간 동안 세 명이 함께 상의한다. 나의 머리를 위해서 성인 세 명이 의견을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 이십 대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 세상이 어색해서 나 혼자 성급히 결정하고 후회하던 내가, 이제는 나의 고민을 먼저 말하고 소통하면서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혼자서 세상을 배워가기엔 이렇듯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번에는 삐죽이 튀어나온 머리들만 조금 정리하고 두 달 더 머리를 기른 후에 파마를 하기로 결정한다. 나는 안심하고 미용실을 나선다. 두 달을 기대하게 되었다.
두 번째 시점은 머리카락이 어깨와 목덜미를 닿기 시작한 시점이다. 이 때는 벌써 6개월 정도 지나는 시점이라, 뒷머리를 움켜잡으며 한 손에 잡히기도 하여 조금만 더 길면 깔끔하게 묶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노란 고무밴드로 한 번씩 묶어 보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섬세한 작업을 위해서 머리띠를 사용해서 앞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기도 한다. 이미 머리가 길어지면서 정수리에서부터 원래 머리가 많이 자란 상태라며 다시 파마를 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판촉행사가 들어온다. 결국 파마를 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컬을 지향한다고 말했지만 마주한 최종 결과는 생각 외로 뽀글뽀글한 파마로 시골 아지매 같기도 하다. 볼멘소리의 투정은 전문가의 식견으로 이내 잠재워진다.
“지금은 많이 곱슬한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원래 파마가 그래요. 며칠이 지나면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거예요.”.
몇 번의 실험 후에 나는 머리카락이 뒷목을 살짝 닿는 정도에서 멈추기로 마음먹었다. 곱슬곱슬한 머리가 제각각 바람에 흩날리는 자유분방함은 묶은 머리를 하고 나면 모두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정도로 관리하며 자르고 또 적당한 시간이 되면 파마를 하기로 했다. 머리를 기르기 시작할 때의 생각은 머리가 길어지면 오히려 머리 자르는 비용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을 했지만, 파마를 하게 되면서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멋진 머릿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크림이나 에센스, 오일 같은 것도 발라 주어야 하기에 추가 부담이 생기고 말았다. 아내가 사용하는 제품을 같이 사용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은 항상 추가 비용을 요구한다. 아니, 세상 모든 것은 길어지거나 커지면 더 큰 비용과 노력을 요구한다. 당연한 진리를 새삼 깨닫는다. 스님들이 머리를 미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겠다.
명상 모임을 이끄는 스님이 계신데, 그 스님은 나의 긴 머리를 부러워한다고 하신다. 스님의 신분으로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라 더욱 그런 느낌이리라. 누구에게는 허락되지 않기에 특이하고 부러운 것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경우가 많다. 나의 머리도 서서히 스스로 평범해지고 있다. 비록 주변 사람들에게는 '베토벤', '대학교수', '과학자'를 연상시킨다며 놀라움을 줄 지라도, 거울을 보지 않는 보통의 하루 들에서는 나의 머리는 스스로 자취를 감춘다. 최소한 나의 관심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운 나의 한 부분이 된다.
연결
지금 나는 반쯤 백발에 뒷 목까지 긴 곱슬머리 파마를 하고 있다. 언뜻 뒤에서 보면 할머니와 헷갈리기도 한다.
볕 좋은 토요일 점심 청사포 해변을 걷던 중에 멈춰 섰다. 바다를 바로 앞에 둔 횟집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바다, 물회, 소주와 곁들여져 책을 읽는 느낌은 새로움을 넘어 즐거웠다. 내가 좋아하는 네 가지가 한 데 어울려진 행복의 순간이다. 혼자만 즐거워 오히려 미안해진 마음으로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왔다. 한참을 걸어가던 내 뒤에서 사장님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머리가 참 멋집니더. 꼭 베토벤 같네예. 또 오세요. “
"고맙습니다. 그럴게요"
사장님의 추억 속 머리와 베토벤은 또 어떠했을지 궁금증과 함께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염색을 하지 않은지 10년 정도, 그리고, 머리를 기르고 파마한 지 벌써 2년이 지나고 있다.
처음엔 '흰머리' '백발'에 대해 염려하고 핀잔을 주던 목소리들도 이젠 바뀌었다. 남자가 머리를 기른다는 어색함이 이제는 익숙함과 호감으로, 그리고 부러움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심지어 주변에는 머리 긴 남자들이 늘어나는 추세가 이를 잘 보여준다.
'머리에 골고루 흰머리가 나서 색깔이 보기 좋다'
'일부러 염색을 하더라도 그런 색깔은 못 내겠다.'
'나도 염색을 하기 싫지만 너는 참 대단하다'
'나도 이 참에 머리를 한 번 길러 볼까?'
내 머리를 일부러 언급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잊고 있었던 추억의 조각들, 누르며 참고 있었던 젊은 날의 로망들에 내 머리를 연결하고 있다. 말하는 이들의 얼굴이 모두 밝고 천진난만하다. 내 안팎에서 놓여있던 부담감과의 지루했던 대치가 드디어 끝났다. 나의 다름이 드디어 받아들여졌고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지금 이 머리는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수많은 표면적 이유들의 가장 밑에는 '자유로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말을 버릇처럼 해 왔었지만, '자유롭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늘 애를 먹었다. 내가 속박되어 있어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인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는 것인지, 모든 관계를 벗어나고 싶다는 것인지. 생각은 그 자리에서 똬리를 틀고 앉아 꼬리를 물고 맴돌기만 하고 있다.
최근에 내린 '자유로움'에 대한 나의 정의는 ‘스스로 만든 굴레들을 깨는 것’그래서 ‘스스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또 다른 굴레가 생기지는 아닐까 걱정도 되지만, 이는 행동과 결심을 뜻하며 나 자신과의 지엄한 약속이다. 아직은 깨야할 것과 남겨 둘 것에 대한 분명한 가르마는 없지만, 하나가 깨어질 때마다 나는 좀 더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동시에 미묘한 책임감도 생겨났다. 서로 얽히고 엮인 세상살이에서 나의 변화는 연못에 던진 조약돌 같이 물결을 일으키게 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누군가는 자극을 받을 것이다. 결국, 나의 생각과 행동들은 나에게만 오롯이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머리 스타일 하나에 너무 많은 생각과 감정과 책임을 올렸다.
머리가 무거워졌다.
괜히 그랬다.
#헤어스타일 #연결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