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비 Nov 25. 2023

필라(@흔희)

#7. 나의 화양연화


2003년 18살. 처음 필라를 만났다. 새하얀 털에 대비되는 파아란 눈을 가진 고양이. 사람에게 큰 관심을 두진 않지만 그렇다고 관심을 아예 무시하지도 못하던 고양이. 새침한 공주님 같았다. 자기 공간을 우두커니 지키고 앉아 우리를 담고 있던 눈동자에는 고요함이 나즈막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종종 M과 나는 J에게서 그녀의 고양이 집사 생활을 들었고 깔깔거렸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집보다 밖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필라를 직접 보는 경우는 줄어 들었다. SNS에 올라오는 사진으로, 가끔씩 웃긴 일화로, 그렇게 필라의 소식을 전해들었고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는 어느새 마흔을 바라보고 있다. 


  2023년 1월. J에게서 연락이 왔다. 필라가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고 했다. 20살이 넘었으니 고양이의 수명을 생각하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슬픔보다는 헛헛함이 크게 밀려왔다. 생각보다 덤덤하게 소식을 전하는 J에게 밥을 사줄테니 나오라고 했다. 그녀는 속이 허할 때면 반사적으로 뜨끈한 국물 음식을 찾는다. 이번에 찾은 메뉴는 복국이었다. 세수만 겨우 하고 마주한 얼굴로 말간 국물을 말없이 떠먹었다. 제법 입소문이 난 복국집이라 손님이 많았고 주변은 시끌벅적했지만 우리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국물 한 숟갈을 떠서 입으로 갖다 대다가 J에게 말했다.


  “우리 인생의 어떤 한 시절이 가는 듯한 느낌이야. 1막이 끝난 느낌이랄까?”


 J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능 공부에 찌들려 잠깐 잠든 네 머리카락 사이에 볼펜을 잔뜩 집어 넣고 키득거렸던 시절이 있었다.

 석식을 먹고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슈퍼에서 사온 아이스크림 한 통에 다 같이 들러붙어 낄낄거리며 퍼먹던 시절이 있었다.

 충동적으로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아무 것도 갖춘 것 없이 그저 즐거웠던 23살의 우리가 있었고

 훌쩍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버린 네가 야속하여 장문의 카톡을 보내며 붙잡던 내가 있었다.

 반찬 가게에서 사온 반찬들을 들이밀며 독박육아에 허덕이는 나를 구제해줬던 너희들이 있었고

 각자의 인생을 견디며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우리가 있었다.


  같은 반 친구로 18살에 처음 만난 J와 M. 그리고 처음 만난 고양이 필라. 스러져가는 생명체의 죽음을 통해 나의 찬란했던 한 시절을 반추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필라는 우리의 빛나던 한 시절을 지켜봐주는 등대같은 존재였다. 화양연화라는 말이 있다. 꽃 화, 모양 양, 해 연, 빛날 화 - 인생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한 시절을 꽃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꽃이 피고 지듯 인생의 한 시절도 피고 진다. 인생의 화양연화는 어떤 한 기간이라기보다는 시절이다. 선이라기 보다는 점이고 지속이라기보다는 한 순간의 장면이다. 그 때는 나를 둘러싼 풍경들이 화양연화인지 모른다. 장면을 뒤로한채, 진행되는 삶의 여러 파동을 겪으면서 한 때의 그 장면은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어쩌면 무엇이라 적확하게 설명할 순 없지만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는 그 장면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부여하기 위해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하고 삶의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각인되었던 한 시절의, 한 풍경의 의미는 사람이었다. 가족과 달리 친구는 선택과 의지가 개입되는 관계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시절 인연으로서만 친구를 뒀었다. J와 M은 내가 처음으로 스쳐가던 시절을 붙잡아 곁에 둔 사람들이었다. 18살, 처음 알아갈 때는 몰랐지만 38살이 되고 보니 이 관계에서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20년의 세월 속에서 어느덧 우리는 같은 듯 다르게 늙어 가고 있다. 성격도 외모도 취향도 다 제각각이지만 삶을 바라보는 궤적이 비슷하다. 울고 웃고 화내는 지점이 비슷하다. 무언가를 특별히 갖추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나라는 사람의 장점은 장점대로 단점은 단점대로 이해받는다. 생활에 치여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가도 문득 함께 지내왔던 장면들에서 그들을 떠올려본다. 장면 장면마다 기억되는 분위기로 그들에 대한 이미지를 채운다. 너희들을 떠올리면 시끌벅적하고 웃기고 따뜻하다. 너희가 있어 내 인생의 장면들이 다채로운 감각들로 채워진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함께 축적되고 있다. 삶의 여러 장면들이 다채로운 감각들로 채워지길 바란다. 또한 그 장면들로 인해 내가 그리고 네가. 그리고 우리가 더 다채로워지길 바란다. 


하루만에 날이 제법 쌀쌀해졌다. 가을과 겨울의 그 어디쯤에서 너도 나도 그리고 필라도 안녕하길.



[#7. 나의 화양연화]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https://brunch.co.kr/@ddbee/39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필라 https://brunch.co.kr/@ddbee/38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다시 올 화양연화를 기다리며 https://brunch.co.kr/@ddbee/40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못골, 흔희, 아난의 글을 2주마다 뉴스레터 땡비로 받아보는 거 어때요?

 - 땡비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35860

 - 지난 글 보러가기 : https://ddbee.stibee.com/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싫어하는 것 (@못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