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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비 Nov 25. 2023

다시 올 화양연화를 기다리며(@아난)

#7. 나의 화양연화


프리지아가 지난봄 새 식구가 되었다. 쨍한 초록색 줄기 위에 눈이 시리게 핀 노란 꽃이 집에 청량감을 가득 채워준다.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샛노란 꽃 여섯 송이가 화려하게 만개하자 봄이 너무도 생생해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활짝 핀 꽃처럼 내게 화양연화는 ‘후회 없이 내 안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펼친 시기’를 의미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때가 화양연화였음을 깨닫는다. 다른 시기와 비교하면서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어때?’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다’라고 말하며 화양연화를 분명하게 자각하던 시기가 있다.


 다들 졸업을 준비하던 4학년 1학기에 훌쩍 독일로 떠났다. 취업에 대한 부담이 있었지만, 교환학생을 갈 수 있는 마지막 학기라 독일로 떠났다. 독일에서의 첫 시작은 한국이라면 겪지 못했을 강렬한 사건들로 가득 찼다. 추운 겨울 늦은 밤, 드디어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는데 도심으로 진입하는 방법을 몰랐다. 짐가방을 내팽개치고 이리저리 물어보는 사이 같이 간 오빠의 노트북 가방을 누군가 훔쳐 갔다. 영어를 모르는 경찰에게 손짓발짓 다 하며 'CCTV를 봐달라' 하고 공항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노트북을 찾을 방법이 없었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이 제물로 바쳐졌는데도 끝이 아니었다. 거대한 짐과 함께 너덜너덜해져 도심 중앙역에 도착했다. 이제 학교로 가서 기숙사 방 열쇠를 받은 다음 기숙사에 가서 짐을 풀어야 했다. 학교까지 가려면 트램을 타야 했는데 난생 처음 보는 트램 앞에서 그제야 깨달았다. 트램 티켓을 사는 방법을 모른 채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 막 스마트폰이 들어오려 하던 시기고 이제 독일에 도착한 내게는 휴대폰도 없어 인터넷 검색을 할 수 없었다. 독일에서 살아갈 굵직굵직한 방법만 찾아봤지 세세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뭐 어떻게 되겠지’하는 안일함이 불러온 재앙이었다. 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주변에 불 켜진 건물도 없어 국제 미아가 된 채 중앙역 앞에서 ‘망했다’ 하며 방법을 찾아 헤맸다.


 그때 갑자기 지나가던 차에서 웬 독일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학생이냐며 묻고는 자기도 학생인데 나와 일행 오빠를 학교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추위에 오돌오돌 떨던 오빠와 나는 땡큐를 외치며 바로 탔고 학교 입구에서 경비원에게 기숙사 열쇠를 받아 다시 곧장 차에 탔다. 기숙사 주소를 보여주자 친절하게도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경황이 없어 그의 이름이나 어떤 연락처도 받아두지 않아 지금까지도 너무나 아쉽다. 이후에도 마치 내가 갓난아이가 된 듯 외국인이 되어 겪는 위기의 상황에 해결사는 나타났다. 길 한복판에서 지도를 펼치고 트램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탄 것인지 너무 헷갈려 확인할 때면 중년의 독일 어르신들이 무심하게 다가와서 한 마디씩 해주시곤 했다.


 독일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많았다. 은행에서 계좌를 열고 체크카드를 발급받으려고 갔는데 카드가 현장에서 발급은 안 되고 우편 발송으로만 가능했다. 본인이 은행에서 카드를 직접 받아가는 게 가장 안전할 텐데 우편을 고집했다. 2주를 기다렸는데 우편으로 카드가 오지 않아 은행에 찾아갔다. 은행 사무실에 직원들끼리 이야기를 하고 있길래 다가가 물어보자 차갑게 "우리 지금 이야기하고 있잖아"하며 내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자 드디어 직원에게 "체크카드 발급을 받으려고 왔다" 하니 "다시 우편으로 받아라"고 했다. "2주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아서 왔으니 그냥 여기서 발급해주면 안 되냐!" 하니 "그럴 수는 없다"고 한다. 그렇게 체크카드 하나 받는데 한 달이 넘게 걸릴 정도로 '빨리 빨리'의 우리와는 달리 그들은 '만만디'였다. “독일어를 할 줄 모르면 오지 마라”고 하는 식당 주인도 있었다. 늦은 밤 내가 가는 길 뒤로 맥주병을 던지는 인종차별도 겪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코리아‘라는 말을 듣고서 대부분 “North(북한)? South?(남한)?”라고 묻기에 내가 분단국가에서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영어가 서툰 탓에 잘 들리지 않아 무조건 ‘응응’ 거리다가 어떤 한국 사람이 가는 나를 붙잡고는 ”북한에서 왔다는 게 진짜예요?”라고 하여 숨넘어갈 듯 웃으며 아니라고 해명한 때도 있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독일에서의 시간이 내게 화양연화인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여유롭고 후회 없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학생증 자체가 무료 기차 탑승권일 정도로 학생을 많이 배려해주는 사회였다. 그 시스템 덕분에 매 주말마다 빠짐없이 여행을 갔다. 오죽하면 다른 나라 친구가 "너는 여행 다니다가 잠시 수업 들으러 오는 거 같다"라고 했다. 유럽에서 눈을 돌리는 곳마다 여행 다큐 속 카메라가 내 눈에 박힌 듯 황홀경이 이어져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스위스에서는 드높은 빙하 산을 뒤로 두고 자전거를 타며 내려와 강가에서 드러누워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이름 모를 스페인 시골에서는 때마침 축제가 열려 동네 사람들과 부슬부슬 오는 비를 맞으며 흥겹게 춤을 추던 나에게 취했다. 도시 전체가 하루 내내 퍼레이드를 하며 테마파크가 되는 독일의 카니발을 보니 우리에게 없는 그들의 대범한 여유와 축제가 부러웠다. 끝없이 걷고 또 걸으며, 사는 듯 여행하고 여행하는 듯 살았다.


 ”너 일해볼래? “라며 같은 기숙사에 사는 카메룬 언니가 일감을 물어다 주었다. 돈도 부족하고 일을 해보고 싶다고 기숙사 부엌에서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했던 게 신기하게 기회가 되어 돌아왔다. 항공기 서비스에 대해 한국어로 설문 조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영어로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와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외국에서 일을 다 해보다니. 나 돈 받아도 되나?’ 하며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그 걱정이 무색하게 시간으로 급여가 계산되는 구조라 대부분 사람들은 오전 내내 ‘티타임?’을 말하며 서서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았다. 반면에 같이 일한 한국인 오빠와 나는 미친 속도로 일을 쳐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가뿐한 마음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며 쉬지 않고 일을 끝냈다. 우리나라의 국민성이 심어놓은 근면 성실한 ‘내 안의 소’가 음-메하고 깨어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독일에 갔기에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사람들이 나의 화양연화를 더 빛나게 한다. 지내는 동안 태국에서 온 민트와 앎이라는 친구와 프랑스인 마린과 특히 친해졌다. 그때 우리에게 가장 큰 걱정은 ‘오늘 저녁에 뭐 먹지?’였을 만큼 모두 먹는 걸 좋아했다. 마린은 자기 가족들과 늘 만들어 먹던 초코케이크와 크레페를 만들어주고 가끔 내게 한국어를 배웠다. 태국의 대표 면 음식인 팟타이는 너무 맛있어서 몇 번이나 배웠고 태국 친구들이 나를 위해 손수 요리책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음식을 앞에 두고 우리는 끝없이 이야기했다. 언어, 문화는 달라도 ‘너는 참 좋은 사람이야.’, ‘뭐든 할 수 있어’라며 서로를 지지하고 챙겨주며 외로워할 틈 없이 보냈다. 반 친구들이 해가 바뀌면 멀어지듯, 독일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는 얕은 인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2011년에 만난 우리는 요즘도 연락하고 한국에서 혹은 외국에서 만나며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같은 시대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친구들은 때로는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싶다가도 ’완전 다른 별천지 세상이네’를 느끼게 하며 내 시야를 갇히지 않게 해준다.


 말 한 마디에 가능성이 펼쳐지고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 충만한 시기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꺼내 본 일기장 속 그때의 나는 계속 ‘시간이 멈춘 것 같다’라고 한다. 나를 둘러싼 한국에서의 걱정이나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내 안을 비우는 시간이 처음이었다. 그때 독일에서의 경험들은 지금의 팍팍한 현실에 지칠 때면 나를 일으켜 세우는 양분이 되었다. 인생의 황금기인 독일에서 내 인생에 들어와 준 소중한 친구들, 기회들, 여행의 순간들이 언제든 ‘내 가능성을 닫지 마’라고 말해준다. 흑백 필름처럼 어딘가 박혀있던 황금기의 추억들이 힘든 일 앞에서는 화려한 색깔로 피어난다. 내 화양연화 시절의 기억들이 만개하면 ‘아유. 이 뭣이라고. 어렵지 않아’하며 내가 가진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펼치게 한다.


 프리지아는 구근식물이라 꽃이 진 뒤 꽃대를 잘라내면 흙 속에서 생강 같은 알맹이들 안에 영양분이 저장된다. 그 알맹이를 일 년 동안 잘 보관하여 가을쯤에 심으면 봄에 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꽃이 항상 핀다는 보장은 없다. 한 해는 꽃을 피우지 않고 쉬기도 한다. 그러다 영양분이 충분히 저장되면 그 다음 해에 꽃이 흙을 뚫고 나온다. 내 인생도 꽃을 활짝 피운 시기를 보내고 다시 알맹이에 영양분을 비축하고 있다. 또다시 꽃대를 올릴 다가올 화양연화를 기다리며.



[#7. 나의 화양연화]  

 - 아버지 못골 글 보러가기 : 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때https://brunch.co.kr/@ddbee/39

 - 딸 흔희의 글 보러가기 : 필라 https://brunch.co.kr/@ddbee/38

 - 딸 아난의 글 보러가기 : 다시 올 화양연화를 기다리며 https://brunch.co.kr/@ddbee/40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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