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할매와 할배에 대한 보고서
내게 ‘할머니, 할아버지’와 ‘할미, 할비’는 완전히 다른 언어처럼 느껴진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거나 거의 왕래가 없었다.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흐릿한 잔상 같은 분들로 기억에 남아있다. 명절이면 뵙던 외할머니를 떠올려봐도 단둘이서 대화를 해본 시간이 10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연결된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이 집에 오면 밥상 가득 음식을 차려주시고 떠날 때 양손 가득 명절음식과 물김치, 단술을 바삐 챙겨주시는 게 할머니의 표현 방법이었구나 싶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한 대를 건넌 엄마와 아버지의 부모님이고 나와는 연결된 적이 없는 관계 같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혈육이지만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하는 가족이자 온도감이 없는 어휘로 남아있다.
그러나 우리 엄마와 아버지가 조부모가 되면서 얻게 된 호칭인 ’할미, 할비‘가 주는 느낌은 노란빛의 식탁등 같다. 할미와 할비는 힘든 황혼 육아에 툴툴대면서도, 인생 2회차의 기회를 얻은 것처럼 인생의 오답노트를 복기한다.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사는 게 바빠서 연서한테 하듯 존중해주지 못했는데 돌아와 보니 미안하네." 할 정도로 우리를 키워낼 때는 놓쳤던 것을 다시금 보고 있다. 부모-자식의 관계에서 할미할비-손녀의 관계로 넘어가니 세월과 연륜을 거치며 여유가 생겼다. 윽박지르며 다짜고짜 등짝을 후려치던 엄마가 할미가 되자 조카가 거짓말을 해도 “할미랑 이야기 좀 해.”라며 찬찬히 아이의 입장에서 마음을 살펴준다. 엄격한 아버지는 할비가 되어 손녀의 공부를 봐주면서 “공주! 받아쓰기 그냥 보고해도 돼. 숫자 틀려도 돼.” 하면서 아이가 기대감에 부응하려 애쓰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좀 힘을 빼고 흐트러질 수 있도록 해준다.
조카의 탄생과 함께 황혼 육아를 시작한 할미와 할비가 어느새 9년 차에 접어들었다. 매일 아침같이 일어나 교대로 아이를 보고 쉼 없이 달려가던 육아가 조카의 혼자서기와 함께 힘 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야 나는 할미와 할비는 단 한 번도 원하는 공간에서 살아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1998년 처음 입주한 아파트는 이제 색이 바래었고 ‘이게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그간의 세월만큼 차곡차곡 짐들이 체할 듯 쌓여있었다. 하지만 청년 사진사였던 할비에게는 자신만의 암실을 가지는, 커피를 좋아하는 할미는 6인용 식탁에서 가족들과 대화를 하는 소소한 소망이 있었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집수리를 하자 했다. 역시나 아끼는데 익숙한 할비는 “물 나오고 전기 나오면 되지. 그냥 우리는 이래 살다 갈게~”하며 매운맛 농담과 함께 집수리를 격렬히 거부했다.
할미와 할비는 대개 고집이 장난이 아니다. 자식들에게 괜한 짐이 될까 봐, 돈을 아꼈으면 하는 좋은 마음이지만 이 마음은 짜증과 역정이라는 포장지에 휩싸여 말이 나온다. 할미, 할비와 대화하기 위해서는 찬찬히 번역기를 돌려가며 포장지를 걷어내고 그 안에 마음을 보며 대화를 해야 한다. ‘견적만 보자’로 무턱대고 현장 일정을 잡은 뒤 덜컥 계약을 하고 할미와 할비에게 통보했다. 공사를 위해 약 한 달 동안 집을 떠나 있어야 된다고 알리자 할미와 할비는 제일 먼저 조카를 못 돌보는 것을 걱정했다. 9년 만에 온 기회라며 걱정 말고 할미, 할비가 가고 싶어 했던 제주 한 달 살기나 템플스테이를 하러 떠나라고 했다. 할미와 할비는 오랜만에 설레기도 하는 듯 친구들과 일정을 논의해 보고 정말 떠날 듯했다. 그러나 할미와 할비는 발걸음을 돌려 ‘가지 마’하는 조카와 워킹맘으로 허덕이는 딸에게로 향했다. 할미는 ‘가봤자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며 한 달동안 지낼 월세를 내느니 차라리 그 돈을 내 새끼들을 위해서 쓰겠다고 했다.
“엄마가 어렸을 때 할머니가 할아버지랑 싸우고 한 달 동안 경주 외가에 간 적이 있거든. 그때 마음이 진짜 너무 허하고 안 좋더라고. 그러고 학교 갔다가 집에 딱 왔는데 할머니 신발이 현관에 보이는 거야. 그제야 마음이 놓이고 할머니가 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좋더라고. 연서한테는 사람이 있다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오는 그 헛헛함을 안기게 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봐도 조카에게는 엄마가 둘이다. 할미가 된 엄마는 어린 소녀였던 시절까지 되돌아가 받았던 상처나 결핍을 돌아보고 그것이 대물림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그래도 할비와 할미가 자신만을 위해서 좀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몇 번을 설득해 보아도 역시나 할비와 할미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고, 결국 한 달 동안 두 분은 조카의 집에서 같이 지내기로 했다. 이삿짐을 옮기느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족들 가운데, 갑자기 대가족이 된 집에서 조카는 총총 뛰며 신남을 감추지 못했다. “연서가 제일 신났더라~”하며 행복해하는 할미와 할비를 보며 그제서야 알았다. 활짝 웃는 조카의 얼굴에 비하면 평생 한 번은 가고 싶다던 템플스테이와 제주 한달살기는 별 것 아님을.
할미와 할비는 인생 전체를 통틀어 지금이 제일 편하다고 한다. 퍼부어야 하는 예금도 없고 자식들도 다 제 밥벌이하고 살기에 할비는 좋아하는 그림과 사진에, 할미는 춤에 흠뻑 빠져 지내면 된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사연 없는 가족이 없고 모든 가족들은 각자의 결핍과 상처가 대부분 대물림된다. 그러나 그것이 대물림되지 않을 수 있도록 끝없이 인생을 돌아보며 애쓴 엄마와 아버지 덕에 조카에게는 할미와 할비가 여러 색깔의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남아있을 듯하다.
70대 아버지와 30대 두 딸이 모여 같은 주제의 글을 써내려가는 뉴스레터 땡비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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