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제주 제2화 - 안개 낀 제주

by SOL

야외 촬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날씨’다. 특히나 풍경을 촬영해야하는 여행 다큐입장에서는 맑은 날씨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카메라를 비롯한 장비들이 물에 젖지 않아야 하는 것도 한몫했다. 어쨌거나 촬영팀에게 ‘비’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가게 된 첫날, 은혜로운 햇살이 비춰줄 것 같았으나 하늘은 무심했다 .부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탈때는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무서워 옆에 앉아 있던 기완의 팔을 붙들었다. 기완은 우리 스튜디오의 막내인 남자애였다. 겨우 23살, 군대도 채 갖다오지 않았다. 그래도 기완은 나보다 스튜디오에 오래 있었다. 그런데 정우오빠는 기완에 대해 말이 나올 때면 고개를 절레절레 젖는다.

“그 자식은 철이 들어야 해.”

정우오빠가 입버릇처럼 기완에 대해서 하던 말이었다. 남자들만의 세계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기완은 형들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태도가 없었고 꽤나 당돌했다. 나는 그것이 ‘요즘 아이들답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래봤자 나랑 2살 차이지만.

우리는 공항에 내렸다. 안타깝게도 안개가 자욱했다. 렌트카를 타고 이동을 하는데 안개가 너무 심해 앞이 안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게 오늘만 그런거라고 생각했다. 오늘 비가 와서 그런거겠거니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제주에 있어서 날씨란 정말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해가 나는가 싶더니 다시 구름이 끼고, 같은 장소인데 어느 한쪽에는 해가 뜨고 또 다른 쪽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남쪽 서귀포로 넘어가면, 날씨가 또 달랐다. 종잡을 수 없는 제주의 날씨였다.



안개가드그윽.JPG.jpg 안개가 가득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제주


사전 탐방없이 5박 6일을 촬영해야했다. 컨셉은 뚜벅이 여행자 스타일. 그래서 버스터미널에서 올레1코스까지 가는 과정도 담기로 했다.

‘북적이는 지하철, 빠르게 달려가는 사람들의 모습, 밤늦게 서류가방을 들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주인공. 피곤한 듯 한숨을 쉬고 집으로 향해 걸어간다.’

첫 시작은 일상이었다. 일상으로의 탈출이 내가 올레길에 받은 인상이었다. 제주는 나에게 그런 곳이었으니까. 일상이 아닌 곳. 비일상. 정해진 수업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보던 사람들도 아니고 색다른 풍경이 보이고 색다른 시간으로 흐러가는 곳. 그래서 그런 컨셉을 잡았다. 일상으로의 탈출

숨가쁘게 뛰는 것을 멈추고, 느린 속도로 걸어보자! 가 내가 처음 생각한 이 다큐의 컨셉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쉼을 주고, 느리게 걷자는 메세지를 전달해야햐는데 .... 오히려 난 이거 때문에 일생에서 가장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으니깐.

사실 난 좀 초조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 올레길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일상으로의 탈출!’ ‘제주의 속살’ 이거 밖에 없었다. 20분의 내레이션에 이 말만 반복할 수 는 없지 않은가.

가구성안을 작성하고 난 뒤에 난 내가 빈껍데기라는 걸 알았다. 삶에 대한 통찰도 경험도 없는 내가 일상으로의 탈출에 무슨 감명을 받겠는가. 도리어 나에게는 푹 찌들어있어야할 일상이 필요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하루와 땀내나는 노동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왜냐면 그동안 나는 설렁설렁 농땡이 부리며 학교를 다녔고, 알바도 안하고 글쓸 거라고 베짱이처럼 있었을 뿐이니깐. 힘들거 없는 일상을 산 사람으로서 ‘일상으로서의 탈출’ 을 운운한다는 사실에 난 스스로 비웃었다.

안개낀 것은 제주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써야하는 글, 앞으로 써야하는 글의 미래도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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