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와 수용적인 태도
'엄친아'라는 말이 등장한 후부터는 이런 수저론의 갈등이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집도 잘 살고, 얼굴도 잘생기고, 거기다 공부와 성격까지 좋으니 태생이 불우한 사람들은 더욱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세태 풍자에 대해서 공감은 하지만 왠지 짠한 마음만은 감출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너의 잘못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너의 잘못이다'라는 빌 게이츠의 말을 차지하고라도 인생의 변곡점은 우리가 하는 선택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20대에 할 일은 사진을 찍는 게 아니라 사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생에는 '변곡점(turning point)', 다른 말로는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를 맞이하는 순간이 있다. 말콤 글래드웰이 주창한 개념으로 '작은 변화들이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쌓여, 이제 작은 변화를 하나면 더 일어나도 갑자기 큰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상태가 된 단계'를 말한다.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 금전, 노력, 수고로움 등의 비용(cost)이나 참가비를 치러야 한다. 제한된 삶의 시간과 자원 안에서 해야 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비용을 들이면서 혜택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변곡점을 맞이하는 게 도전과 시련 등의 노력이 쌓여야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을 보면 이와 관련된 유의미한 내용이 나온다.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42년 9월부터 45년 4월까지 유대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서 의사의 임무와 일반 수감자로 강제 노역을 감당해야만 했다.
수용소 주치의에 따르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까지 짧은 일주일 기간에 사망자가 급증을 했다고 한다. 원인을 살펴보니 수감자들 대부분은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는데 막상 그 시간에 다가와도 희망적인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급기야 절망감에 빠쪄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막연한 희망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라 냉철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던 사람이라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죽음을 초월해 성자로 죽음을 맞는 이가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환경에 순응해 짐승 같은 처참한 삶을 살면서 인간이길 포기한 이들도 있었다. 어떠한 제약과 통제 환경 속에서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만은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만약 흙수저로 태어나더라도 너무 상심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어떤 불행한 상황과 역경이 닥쳐도 우리는 자기 삶의 목표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라도 꾸준하게 바꾸려는 노력을 시도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바꾸려고 노력하면 된다.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그런 노력들이 쌓이게 되면 어느 순간 큰 변화의 폭발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티핑 포인트'인 것이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냥 해야 할 일들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하기만 하면 된다. 모든 노력의 결실은 이런 과정들이 자연스럽게 쌓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그것에 무관심하으로써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타인의 시선보다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막연한 낙관적인 희망보다는 냉철한 현실 감각을 바탕으로 순응하면서 자유 의지를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