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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Mar 13. 2022

행복한 봄 나들이 (2편)

#엄마 #아내 #운문사 #봄의 전령사 #봄 나들이 #불심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작년 동짓날 아침, 난 83세의 노모를 모시고 팔공산 갓바위 정상을 힘겹게 올랐던 적이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위해 갓바위까지 최단거리 코소를 선택했다. 마침 당일 날씨도 우리 모자지간의 동행을 응원하는 것처럼 겨울이불처럼 포근하고 따뜻했다. 열댓 번 오르고 멈추고를 반복하면서 꽤 지쳤을만한데 엄마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 밝고 행복해 보였다. 아마 오랜만에 부처님을 뵐 수 있다는 기대감과 믿음 때문은 아니었을까. 


공양을 드린 후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 탓인지 엄마는 힘겹게 올라올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한걸음에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야야 오늘 참 좋았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꼭 한번 다시 절에 오자꾸나"라는 말로 엄마는 나와의 두 번째 동행을 구두로 예약하셨다. 정말 좋으셨나 보다.


https://brunch.co.kr/@ddc8fafd53894cb/161





언제 겨울이었는지도 모르게 봄이 일상생활 속으로 불쑥 들이닥쳤다. 따뜻하고 포근한 봄기운이 퍼지자 난 엄마와의 두 번째 동행 약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번엔 아내와 함께 엄마를 모시고 절에 가기고 사전 약속하고 일정을 잡아서 엄마께 전화를 드렸니 너무나 좋아하셨다. 일전에 팔공산 갓바위를 힘겹게 오르던 엄마의 안쓰런 모습이 생각나 이번에는 차로 절 입구까지 편안하게 갈 수 있는 청도 운문사를 목적지로 정했다.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청도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사찰로 고려초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雲門禪寺)'로 사액을 내린 이후 운문사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말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이기도 하다. 1950년대 비구니 사찰이 되었고, 1958년 비구지 전문강원으로 시작된 운문 승가대학은 현재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참고로 역사가 오래된 사찰인 만큼 경내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즐비해 있다. 신라 때 만들어진 구리 항아리인 동호를 비롯해 비로전, 금당 앞 석등, 3층 석탑, 원응국사비, 석조여래좌상, 사천왕석주 등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웅보전, 오백나한전, 만세루, 작압전 등 크고 작은 건축물들이 있다)


엄마 집에 활짝 핀 매화꽃, 벌들이 꽃을 모으느라 분주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이번에도 난 날씨 어플을 통해 가장 기온이 따뜻한 날을 나들이 일자로 선택했다. 낮 최고 기온이 20도까지 오를 정도로 날씨기 포근하고, 봄기운이 완연한 오전 10시쯤 엄마 집에 도착했다. 집 마당엔 매화꽃이 만개해 있었다. 전국적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벌들 소식이 무색할 만큼 많은 벌들이 매화꽃 주변에 몰려들어 꿀을 모으느라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굳이 안 먹겠다던 아침을 정성스럽게 차려놓으셨다.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에 콩나물밥과 곰국을 가득 담아서 내게 건네셨다. 출가하기 전 매주 일요일마다 먹었던 콩나물밥을 보니 왠지 식욕이 솟구쳤다. 귀가 잘 안 들리시는 구순의 아버지도 입 주위에 이것저것 묻혀가면서까지 막내아들인 내게 질세라 아주 맛나게 콩나물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뚝딱 비우셨다. 식사량은 나와 거의 맞먹을 정도니 아마 아버지의 장수 비결의 핵심은 삼시세끼 밥심이 아닐까. 한 가지 보탠다면 충분한 수면시간인 같다. 참고로 아직도 내게 하루에 한통씩 이메일을 보내신다.  


식사를 마친 후 우린 엄마와 함께 절에 다녀오겠노라고 아버지께 크게 말씀을 드리고 집을 나와 차를 타고 청도 운문사로 향했다. 겨우내 한 번도 작동하지 않았던 자동차의 선루프를 오랜만에 완전히 개방했다. 선루프를 통해 들어오는 바깥바람조차도 포근하게 느껴졌다. 굳이 힘들게 절에 갈 필요가 있느냐며 오늘은 운문사로 갈 거라는 내 말에 엄마는 초등학교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한껏 들떠하며 좋아하셨다. 엄마는 초등학교 시절 운문사로 소풍을 와서 절 앞 계곡에서 고디(다슬기의 경상도 사투리)도 잡고 재밌게 놀았던 추억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말씀하셨다. 




절 입구에 도착하자 수백 년 됨직한 아름드리 노송들이 솔향기를 그윽하게 내뿜으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온갖 풍파와 세파를 온몸으로 견뎌온 등 굽은 노송들은 묵묵하고 듬직하게 운문사를 지켜오고 있는 것 같았다. 솔숲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우리들은 운문사 뜨락으로 들어섰다. 전국 최대의 비구니 사찰답게 아기자기하고 정갈한 정원을 비롯해 온 산사를 둘러싼 호거산(호랑이가 웅크리고 감싸 안고 있는 형상에서 따옴)이 멋진 풍광을 이루고 있었다. 


운문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처진 소나무가 가부좌를 튼 듯 꼿꼿하게 그 자태를 드리우고 있었다. 수령 500년 된 처진 이 소나무는 어느 선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시들어진 나뭇가지를 꽃아 둔 것이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이르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마다 삼짇날(음력 3월 3일)이 되면 막걸리 12말을 희석해서 영양제로 부어준다고 한다. 그런 덕분인지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모습이 여전히 푸르고 싱싱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한참 동안 처진 소나무를 쳐다보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처진 소나무 / 대웅보전 주법당 / 삼층석탑


입구 범종루 우측에 위치한 주법당인 대웅보전은 코로나 때문인지 정문이 모두 닫혀 있었다. 하지만 법당 우측 한켠에 출입문 한개가 열려 있어 난 엄마를 모시고 조용하게 법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넓은 법당에는 미리 온 두 명의 보살들이 정성스럽게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부처님께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난 옆에서 경건하게 엄마가 정성스럽게 절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무엇을 빌고 계셨을까. 아마 퇴직한 나를 위해서도 뭔가를 빌고 계신 것 같았다. 


주법당을 나온 후 엄마는 삼층석탑을 세 번 돌며 탑돌이 의식을 진행했다. 오직 자식만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엄마가 남은 세월 자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어쩌면 최선의 방법이 바로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기원하는 것이었으리라. 정승스럽게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절을 올리는 등 굽은 엄마의 뒷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울컥함과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마치 나무 밑동까지 늙은 소년을 위해 내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말이다. 


비구니 스님이 수양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운문사의 정원은 정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완연한 봄기운을 받은 탓인지 나무마다 꽃망울이 조만간 터뜨릴 기회를 고대하며 터질 듯이 봉긋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한국 사찰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면 꼭 등장하는 청도 운문사. 매년 4월이면 운문사에는 싱그러운 봄꽃들의 향연이 펼쳐진다고 한다. 그중 세월의 깊이를 넉넉히 품어 안은 벚꽃들이 화사한 꽃터널을 만든다고 하니 조만간 꼭 한번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우리 셋은 잠시 절 한켠에 있는 정자에 앉아 운문사의 봄기운을 각자 자신들만의 평온한 창으로 감상했다.


운문사 정원 정경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내가 오늘 한턱 쏠게"


며느리가 함께 와서 고마웠는지 엄마는 오늘 쌈짓돈을 거하게 한번 풀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셨다. 나도 배가 출출했던 터였다. 우리는 차를 타고 운문사 입구 인근에 있는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청도 하면 미나리 아닌가. 미라니전 한 접시와 칼국수 두 그릇, 그리고 막걸리 한 병을 시켰다. 물론 막걸리는 엄마를 위한 배려였다. 시장기가 반찬이라고 했던가. 막걸리 한잔에 미나리전을 먹으니 세상 남 부러울 것 없었다.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엄마는 기어이 내 카드를 뺏고 쌈짓돈을 꺼내서 계산을 하셨다. 며느리에게 맛있는 것 사주고 싶었다고 말이다. 엄마를 이길 수 없었다. 


미나리전 / 모링가 열매 씨앗 / 발표커피와 발효빵 (참고로 막걸리 한잔만 마셨으니 신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그 대신 이차(?)는 내가 쏘겠다고 다짐을 받은 후 인근 커피숍으로 이동했다. 그냥 집으로 가기엔 봄 날씨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인근의 커피숍을 빠르게 탐색해보니 건강에 좋은 발효커피숍이 있어서 호기심에 그리로 향했다. 일반 커피와 달리 아라비카 커피 원두와 국산 자연약초, 그리고 특허받은 발효비법이 들어가 있다는 커피를 주문했다. 


일반 커피는 몸을 냉하게 만들지만 발효커피는 몸을 따뜻하게 한다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카페라테 두 잔과 아메리카노 한잔, 그리고 발효빵을 디저트로 주문했다. 다방커피만을 늘 드시는 엄마를 위해서 일부러 달달하고 거품 가득한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잠시 후 커피와 함께 모링가 씨앗이 서비스로 나왔다. 산삼보다 건강에 좋으니 조금만 맛보라고 주인이 말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모링가 열매는 기적의 치료 열매이며, 지구 상의 모든 식물 중에서 가장 영양가가 높다고 나와있었다. 몸에 좋다고 하니 그냥 맛있게 먹으면 될 것 같았다. 산삼의 사포닌 성분처럼 약간 쓴 맛이 났지만 참고 먹을만했다. 커피맛은 생각보다 깊고 풍부했다. 엄마는 카페라테를 태어나서 처음 마셔본다고 말씀하셨다. 맛도 달달하고 거품도 있어서 입에 맞다고 하시면서 그동안 묶어 놓았던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그동안 귀가 거의 안 들리시는 구순의 아버지와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느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렇게 느리고 여유 있는 오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오후 네시가 다되어서야 아버지께 드릴 발효빵 한 개를 별도로 포장해서 커피숍을 나왔다. 집까지 약 한 시간 이상 소요될 예정이었다. 집으로 가는 동안 엄마는 막내아들 내외와 함께 한 운문사 여행이 좋았다고 연신 말씀을 하셨다. 조만간 벚꽃이 만개할 때 장모님과 함께 나들이하면 어떻겠냐는 나의 제안에 엄마는 "사돈 하고 오면 정말 좋지"라고 반색하셨다. 아내도 그러자고 흔쾌히 승낙했다. 그때는 청도에서 유명한 온천도 모시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친가에 내려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난 내심 뿌듯하고 코끝이 찡해짐을 느꼈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셨을까. 엄마는 오십 대 중반에 퇴직한 막내아들이 늘 맘에 걸렸을 것이다. 그간 일한다고 고생했다고, 그리고 이제는 푹 쉬어도 된다고 말씀은 하셔도 아마 맘 속엔 늘 걱정하셨을 것이다. 미신을 믿진 않지만 무료 사주를 봐주는 온라인 사이트가 있어 찾아보니 올해엔 귀인이 찾아올 거란 풀이가 있었다. 


귀인(貴人)은 삶의 변곡점을 만들어주는 귀한 인연을 말한다. 그리고 인생을 살면서 바른 방향으로 자신을 이끌어주는 사람을 말한다. 아마도 내게 있어 귀인은 항상 내가 힘들고 지칠 때 삶에 위로와 용기를 주고,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오늘 난 귀인을 두 명 만났다. 바로 엄마와 아내 말이다! 퇴직을 했지만 올해엔 아마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다. 귀인을 그것도 두 명이나 만났으니. 빼앗긴 내 마음의 들판에도 봄이 오고 있는 것 같다. 


엄마, 여보 사랑하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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