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이 굽고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머리의 주인공 마마 코코는 최근 기력이 떨어지면서 기억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구두닦이 소년 증손자 미구엘은 전설적인 가수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와 같은 뮤지션이 되는 것이 꿈이지만 집에서는 기타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걸 엄격하게 금지시 여기죠. 어느 날 미구엘은 우연히 '망자의 날'에 죽은 자들이 사는 세상에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여골절 끝에 고조할아버지인 '헥터'를 만나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미구엘은 '망자의 날' 새벽이 임박해서 서둘러 집으로 향합니다.
저승에서도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승에 사는 후손들이 망자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면 망자의 세계에서마저 영원히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최근 마마 코코가 최근 기억이 쇠퇴하면서 자신의 아빠를 잊어가는 중입니다. 가족들에게 음악이 금기시되었던 건 증조할머니인 코코가 어렸을 때 뮤지션이었던 아빠가 음악을 위해 어린 딸을 내버려 두고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온 미구엘은 마마 코코에게 잊혀 아빠의 존재를 다시 일깨우기 시작합니다.
"할머니, 아빠 기억나세요. 아빠를 잊으시면 절대 안 돼요."
미구엘의 간절한 말에도 마마 코코는 아무 미동도 없습니다. 그때 미구엘은 울먹이는 소리로 리멤버 미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기억해 줘. 내가 안녕이라고 말해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난 널 생각하며 널 내 마음에 둘 거야..... 슬픈 기타 소리를 들으면 부디 알아줘. 나 이렇게 노래 부르며 널 꼭 안아줄 날을 기다린다는 것을. 널 꼭 안아줄 날을 기다린다는 것을"
그때 마마 코코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다섯 살 어린 소녀의 미소로 미구엘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합니다. '리멤버 미'는 아빠인 헥터가 딸인 코코를 위해 만든 자장가로 매일 밤 어린 딸을 위해 불러주었던 노래입니다. 어린 마마 코코의 맘속 한켠에 아빠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죠. 이승에서 망자를 아는 마지막 사람이 죽었을 때 저승 세계에 살고 있는 망자도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이 가슴 한켠을 아리게 합니다. '기억하는 것은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코코>의 한 장면
너무나도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꽃>은 1952년에 발표되고 이듬해에 시집 『꽃의 소묘』에 수록된 김춘수의 시 작품입니다. 여기서 이름을 불러주는 명명(命名) 행위는 그 존재를 인식하고, 다른 존재와 구별하며,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드는 고귀한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대상은 그저 의미 없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합니다.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몸짓'에서 '꽃', 그리고 '눈짓'으로 점진적인 인식의 확대는 명명이란 행위를 통해서만 이뤄집니다.
인간은 살면서 자신의 이름이 남겨지고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떠나고 없는 세상에서도 남은 사람들이 자신을 아름답고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죠. 더 나아가 역사 속에서도 영원히 기억되고, 기록되고 싶어 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모든 작가는 불멸을 꿈꾸는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작가가 소설을 쓰는 이유는 결국 불멸을 꿈꾸기 때문이죠.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후세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면 작가는 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책을 출간하고 싶은 저의 바람도, 블로그라는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글을 쓰고, 타인과 공유하며, 공감과 댓글을 다는 일련의 과정도 어쩌면 서로 간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잊히지 않으려는 몸짓과 눈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는 잊지 말아야 할 꽃이 있습니다. 바로 물망초(勿忘草)입니다. 꽃말은 'forget-me-not', 즉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꽃말은 '진실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두 꽃말은 일맥상통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여러 해 살이인 물망초는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유럽이 원산지로 꽃, 잎, 줄기를 이용해 요리용으로도 많이 쓰입니다. 꽃은 샐러드나 요리의 장식에 사용하며, 호흡곤란이나 가슴 통증을 위한 시럽을 만드는 데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물망초의 속명은 Myosotis는 그리스어로 생쥐를 뜻하는 myos와 귀를 뜻하는 otis의 합성어로 작고 부드러운 잎이 생쥐의 귀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물망초라는 꽃 말의 유래에는 여러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먼저 아담이 꽃의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입니다. 에덴동산에 살고 있을 때 아담은 '튤립'이나 '파랭이꽃' 등 많은 꽃나무에 이름을 붙이며 노니는 걸 좋아했죠. 어느 날 작은 꽃이 "내 이름은 없나요?"라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이렇게 예쁜 꽃의 이름을 빼먹다니! 내 다시는 너를 잊지 않겠다. 너의 이름은 물망초(forget-me-not)다"라고 말하며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독일의 다른 전설에 따르면 성주의 딸이면서 마음과 얼굴이 예쁜 벨타와 젊은 미남 기사 루돌프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의 시샘인지 벨타는 불치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하는 운명이었죠. 화장한 어느 날 두 사람이 다뉴브 강가를 거닐다가 강 건너 맞은편 낭떠러지에 이름 모를 아름다운 보라색 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갖고 싶어 하자 루돌프는 위험을 무릅쓰고 꽃을 가져오다 머플러가 날아가는 바람에 발을 헛디뎌서 그만 강물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버렸죠.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그녀에게 꽃을 던지며 "나를 잊지 말아주시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 말이 꽃말이 된 것이죠.
인기리에 종영되었던 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 향미(손담비)는 동백(공효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동백꽃 꽃말(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합니다) 덕에 네 팔자는 필 거야. 그런데 더럽게 박복한 꽃말도 있어. 물망초 꽃말이 뭔지 알아? 나를 잊지 말아요야. 너도 나 잊지 마. 너 하나는 나 기억해 줘라. 그래야 나도 살다가 간 것 같지." 그런데 물망초는 향미의 어린 시절 엄마가 운영하던 술집의 이름이기도 했죠. 드라마 속 향미는 사랑받지 못한 슬픈 존재였던 것이죠.
여태껏 잊고 잊히는 현상인 망각은 우리의 기억 체계가 지닌 하나의 결함이며 적어도 성가신 골칫거리라는 것이 일적인 견해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망각은 방지하고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는 대상이었죠. 하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잊고 잊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한국일보 기사 "망각은 싸워야 할 대상 아냐… 행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22.5.19)"이란 기사에서 미국 컬럼비아대 신경학과 정신의학을 연구해 온 스콧 A. 스몰 교수에 따르면 망각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생리현상이며, 복잡한 세상에서 쏟아지는 불필요한 정보들로부터 인간을 구해내는 장치이자 창의적 활동을 뒷받침하는 토대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어서 정신을 보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기억과 균형을 이루는 망각이야말로 끊임없이 변하며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많은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본연의 진정한 인지능력”이라고 말합니다. 망각은 정신건강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환자의 경우, 충격적인 사고나 사건을 겪은 이후 몇 달 뒤부터 여러 증상이 나타나는데 사고나 사건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되살아나서 환자를 괴롭힌다고 합니다. 저자는 억울하고 괴로운 일을 당했더라도 거기에 매몰되어 혼자 고립되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삶에 유머를 더해야 하며, 충분히 잊으려고 노력하자라고 다독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한 도전이라고 말이죠.
마지막으로 가장 숭고한 점은 감정적 망각을 통해 자유로워지는 과정에서 비로소 용서가 가능해진다고 말합니다. 용서한다고 해서 자신을 화나게 했던 사건을 실제로 잊는 것은 아니며 그래서도 안 되지만 용서하기 위해서는 부글거리는 분노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이죠. 망각은 잊어버리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혜택인 겁니다.
출처 : Pixabay
시월의 마지막 밤이 찾아오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가 되곤 합니다.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한다는 절규, 이룰 수 없는 꿈의 슬픔이 노래 가사에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슬픈 가사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이 노래에 집착하는 걸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랑하는 사람과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헤어져 본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픈 사랑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사랑의 아픔은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번 사랑에 데인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을 마음속에 들이지 못합니다. 지나간 사랑의 자리에 큰 아픔의 구멍이 생겨 다른 사랑을 들여 메울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죠. 헌신하면 또 헌신짝처럼 버려질까 두려워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생긴 큰 상처의 구멍을 메울 사람은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 상처를 보듬고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니 지나간 사랑에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시고 마음을 열어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사회에는 피치 못하게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겨 기억을 지워버리는 치매를 앓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잊는 사람과 잊힌 사람과의 아픔과 힘듦 간극이 매우 큰 병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잊는 사람보다 잊히는 사람의 아픔이 큰 병이죠. 평생 치매 환자를 담당해 온 한 의사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내가 만약 치매 환자나 치매 환자 가족 둘 중에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다면 자신은 치매 환자로 살고 싶다는 말이었죠. 그만큼 잊혀지는 사람, 즉 환자 가족의 어려움이 크다는 말일 겁니다.
대중을 관심을 먹고 살아가는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팬과 대중에게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잊혀지지 않기 위해 때론 사회적 논란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릇된 언어나 파격적 행동으로 대중을 관심을 끌려고 애씁니다. 그들에게 잊혀진다는 것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보고 싶어도, 잊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만나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구체적인 이유는 자신도 모릅니다. 다만 자신이 더 이상은 감당할 수 없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체념도 짙어지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받아들이면서 심연의 상처도 시나브로 아물기 시작합니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면 추억의 서랍장에 그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가끔 끄집어내서 들추어 보는 게 좋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안하다 그때 모른척해서 미안해. 너무 아는척하고 싶으면 모른척하고 싶어져." 영화 <아저씨>에서 태식이 소미에게 한 말입니다. 근데 너무 보고 싶으면 외면하게 되는 것일까요?
영화 <아저씨> 스틸 컷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혹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로 자신의 삶을 위안하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잊혀지지 않기 위해 하나의 몸짓과 눈짓이라도 보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다. 엄마가 요즘 자꾸 깜빡깜빡해"라고 말하는 엄마의 말을 귀담아들을 걸 그랬습니다. 저 깜빡깜빡은 혼자 두지 말라는 표시등이었습니다.라는 문구가 오늘따라 마음을 깊게 파고 듭니다. 저녁에는 사랑하는 엄마에게 전화라도 한통 드려야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