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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Mar 05. 2021

제멋대로 사는 '자연인' 친구를 소개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 #희망퇴직 #한산도 #전원주택 #낚시 #죽음

MBN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서 '자연인'을 항상 꿈꿔왔던 절친 한 명이 있었다. 해병대 출신이자 낚시 마니아인 그 친구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늘 주말이면 전국의 모든 바다낚시 포인트를 찾아다니곤 했다. 당연히 평일 퇴근 후에는 아쉬움이 남는지 TV 채널을 이리저리 탐색하면서 <나는 자연인이다>를 찾아보고, 심지어 재방, 삼방까지 챙겨보던 친구였다. 직장인 누구나 말하는 'S생명'이었다. 죽음과 가까이서 삶을 바라봐서인지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살아있을 때 지 좋아하는 것 하면서 살아야 죽을 때 덜 후회한다"라고 늘 내게 말하곤 했다. 


예전에 같은 건물에서 지점장을 했던 친구라 유달리 친분이 두터웠다. 여성을 많이 대하는 직업의 특성상 늘 스트레스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퇴근 후 술자리도 잦았다. 그 후로 난 계열사 전배로 다른 직장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고, 가끔씩 통화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 내가 지방 근무로 발령이 나면서 그 친구와 같은 지역에 근무할 기회가 생겼다. 못하는 낚시지만 그 친구를 만나서 가끔은 방파제 낚시를 배우고 함께 잡은 선어들을 그 자리에서 회를 떠서 먹기도 했고, 아내가 몸이 안 좋을 때 그 친구는 숭어를 잡아서 집에서 매운탕을 끓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그 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는 양가를 오가며 가족 간 정을 돈독하게 나눴다.




내가 다른 지방으로 이동해서 근무를 할 때 그 친구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뭔 일이고?"

"야 내가 드디어 꿈꾸던 퇴사를 하게 되었다"

"진짜가? 둘째가 아직 고등학생인데 정신없는 것 아이가?"

"아이다. 이번에 희망퇴직이 있어서 단디 맘먹고 신청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인데 하루라도 빨리 지 좋아하는 것 하다 죽어야 안 되겠냐"

"정신 차려라. 애들 대학교는 졸업시키고 그만둬야지. 제수씨는 뭐라고 하더노?"

"집사람이야 아무 말 안 하지. 우짜겠노. 남편이 하고 싶다는데. 그냥 내 하고 싶은 대로 하는기라. 그리고 기왕 하려면 오십 대가 되기 전에 해야지 인생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기라"

"생계는 우짤끼고?"

"적금하고 명퇴금 나온 거 다 주고 떠날끼다. 무책임하게 그냥 가는 건 아니니 걱정 마라. 집사람은 지금 하는 공부방 좀 더 해야 안 되겠노"


뭐가 급했는지 그 친구는 잘 다니는 회사를 때려치웠다. 더 이상 기다리다가는 돌겠다고.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용기를 낼 수 업을 것 같다고 말을 마무리했다. 계속되는 나의 설득도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예전부터 간절하게 꿔왔던 '자연인'의 꿈을 실현하고 싶다는 친구의 얘기가 더 이상 남의 얘기로 들리지는 않았다. 사실 나도 하루빨리 이 전쟁터를 떠나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었던 것이다. 난 그 친구처럼 용기도 없었을뿐더러 내심 내가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두려움이 내면에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로 욕을 했지만 한편으로 그 친구의 단호한 결정과 용기가 부럽기도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고된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누구나 푸른 대자연을 그리워한다. 물질문명 속에서 숨 가쁘게 달려오다 보면 정작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상의 가치를 외면하고 살게 된다. 우리가 꿈꾸던 삶은 보이는 모습의 성공이 아닌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인데 말이다. 여치의 울음,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 새소리와 계곡의 물소리는 일상에 지친 사람들을 치유하는 소리다. 하지만 '이렇게 원하는 것을 누리려면 어느 정도 여건과 환경이 성숙된 이후에야 가능하지 않을까?'라고 나는 혼자 조용히 되뇌었다.




"모든 것을 정리해서 아이들 앞으로 일정 금액  통장을 만들어 주고, 나머지는 와이프에게 다 주고 몸만 갈 거다"


그렇게 그 친구는 예전부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꿈꾸던 생활을 하기 위해 무작정 남해 섬들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처음으로 간 곳은 통영의 학림도였다. 약 오십여 가구가 모여있는 섬으로, 송림이 무성하고 학(백로, 왜가리)이 많이 날아와서 일명 '새섬'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거주인들 대부분이 노년층으로 양식과 어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차를 끌고 간 첫 번째 섬의 낚시 포인트에서 그는 우연히 섬 주민을 만났고, 집을 구한다는 친구 말에 마침 빈 집이 있다며 그 친구에게 소개했고, 돈 한 푼 안 받고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내 친구는 그곳에 바로 둥지를 틀었다. 낚시를 좋아하던 친구에게 학림도는 그야말로 해상낙원이었다.


친구의 요청도 있었지만 난 그 친구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아내와 함께 학림도로 간 적이 있었다. 통영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학림도는 매우 가까웠다. 햇살 좋은 날 그곳에 도착하니 태양에 반사되어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가 한눈에 다가왔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환상의 데칼코마니를 이루고 있었다. 바람에 넘실거리는 파도의 물결은 우리 부부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다. 아내와 난 그곳의 유일한 민박집에 짐을 풀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빈집 주택이다 보니 제대로 유지관리가 되지 않은 집이었다. 겨울인데도 난방이 되지 않아 거실에 난로를 피우고 있었고, 화장실 문은 떨어져서 거실 한켠에 세워져 있었다.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사는 모습에 왠지 측은지심마저 생겼다.




시간이 흘러 저녁 무렵이 되자 바닷바람이 갑자기 거세졌다. 하지만 오랜만에 옛 친구가 와서 몹시 반가웠던 친구는 '놀러 온 우리 가족에게 맛있는 회를 먹여야 한다'며 거친 풍랑에도 불구하고 집주인에게 부탁해 배를 타고 인근 양식장으로 가서 참돔 두 마리를 공수해 왔다. 오랜만에 외지에서 이방인이 놀러 와서인지 내 친구는 마을 청년회장님과 총무님을 술자리에 초대를 했다. 불편할 줄 알았던 술자리는 오히려 유쾌하고 즐거웠다. 다만 청년회장님의 연세가 60대 중반이었고, 총무님 또한 50대 초반인 것이 조금 의아했긴 하지만 말이다. 


술자리가 이어지자 안주가 부족했고, 급기야 청년회장님이 직접 집으로 뛰어가 현지에서만 잘 잡힌다는 벵에돔을 가지고 와서 직접 구워 주셨다. 현지에서 먹는 게 뭐가 맛있지 않겠는가? 마지막은 해장라면으로 마무리했다. 이튿날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학림도 곳곳을 산책했다. 특히 조망대에 오르니 학림도 주변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이래서 내 친구가 여기에 터를 잡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때가 되니 전일 우애를 다졌던 형님들께서 점심을 초대하셨다. 근데 장소가 학교였다. 학생 세명과 선생님 한 명이 다인 조그마한 분교였다. 점심의 경우 학부모들이 돌아가면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고 했다. 그날 점심은 초밥이었다. 형님의 초밥 만드는 솜씨는 거의 전문 초밥집 이상이었다. 활어회 초밥이다 보니 회도 두껍고 맛도 일품이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맛이었다. 이곳 현지인들이 아니면 절대 맛볼 수 없는 그런 맛이었다. 그렇게 초밥으로 해장을 마친 후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잠시 후 친구를 따라간 곳은 바로 형님의 배가 정박한 곳이었다. 선생님을 출퇴근하는 것도 학부모들이 챙기고 있어 집으로 갈 거면 배에 타라고 형님이 말했다. 배에 타니 형님이 투망으로 잡았다던 대형문어 한 마리와 엄청나게 많은 해삼을 큰 봉지에 담아서 섬을 떠나는 우리 부부에게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셨다. 우린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 너무 대접받아서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학림도 일정을 끝마쳤다. 





그렇게 내 친구는 3년간의 학림도 생활을 마치고 다시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이유는 바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 때문이었다. 낚시도 좋고, 자연인 생활도 좋지만 결국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은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몇 개월 집에서 백수처럼 빈둥거리다 결국 다시 떠난 곳이 바로 '한산도'였다. 그곳에서도 친구의 넓은 오지랖과 친화력은 빛을 발했다. 펜션을 운영 중인 주민을 만나게 되었고, 주인의 배려로 펜션 빈 공터에 농막 형태의 컨테이너 한동을 자비로 설치해 그곳에 다시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살면서 친구는 인생의 최종 종착지라고 생각해 펜션 주인 소유의 인근 토지 200평을 저렴하게 구매하게 되었다. 조만간 제수씨와 함께 사는 게 친구의 절박한 소망이다. 


물론 나와 아내는 한산도 소재의 친구 집을 다녀왔다.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산 중턱에 펜션이 위치해 있었고, 그 펜션 구석 한켠에 친구의 컨테이너와 땅이 위치해 있었다. 기대와 다르지 않게 펜션의 숙소 시설은 매우 불편했지만 공원 같은 넓은 조경은 놀이공원처럼 크고 광대했다. 특히 야자수 나무와 종려나무가 이국의 해변의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날따라 낚시의 조과가 원활하지 않았다. 친구의 투혼으로 우여곡절 끝에 자연산 벵에돔과 오징어를 겨우 잡았고, 간단하게나마 회, 구이, 지리탕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기대보다는 조촐했지만 친구의 사랑이 가득 담긴 만찬이었다. 물론 우리가 준비해 간 펜션 음식으로 커버해서 다행이긴 했다. ^^;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 지 하고 싶은데로 하고 살아야 된다. 그리고 인생 뭐 별거 있냐, 최소한의 돈만 있어도 행복하다. 너 보면 맨날 자연인 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넌 지금의 삶의 무게를 벗어던지기는 힘들끼다. 그래도 빨리 오너라. 내가 터 잘 닦아놓고 있을게. 제수씨하고 우리 와이프 하고 그렇게 함께 재미있게 살아보자."


요즘 그 친구가 한산도에서 내게 했던 말이 자주 생각이 난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내 친구는 순수 자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냥 제멋대로 재미있게 사는 이방인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친구가 정말 부럽고 멋있는 것은 바로 가진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아서 떠나는 용기라고 나는 소심하게 말할 수 있다. 사실 나는 현재 내가 해야만 하는 책임과 의무를 포기하기가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들개가 된 친구와 달리 난 여전히 언제 버려질지 몰라 전전긍긍 두려워하는 집개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전보다 욕심을 더 비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아내를 설득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그 친구의 전철을 한번 따라가 볼 계획이다. 그러기 위해서 난 여태껏 모으고 축적하는 데 집중하면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줄이고 비우는 데 집중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을 해본다. 


"친구야 조금만 기다려라. 그리로 달려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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