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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프란츠 Apr 14. 2024

또 다른 계절

메트로(METRO)

무가지(無價紙) 신문 '메트로(Metro)'가 시청역 입구 가판대에 놓여 있었다. 요즘은 노점상에서도 보기 힘든 종이신문이지만, 출근길을 서두르며 이를 거들떠보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호들갑을 떨며 서로 집어가려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는 거대 도시이다. 도시 크기에 비례하여, 층층이 쌓인 사람들의 욕구가 충족되도록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가 산출되고, 자본 증식을 위한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도시로 유입된 사람들은 대개 노동자가 되어, 경제적 효율성과 부가가치 생산이라는 미명 아래 분주히 시장에 던져지고, 보이지 않는 시장에선 노동 가치가 양질로 계측되고 평가된다. 그 결과, 차별적이거나 모순적인 임금 구조가 합리적인 것으로 납득된다.  


메트로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소비 주체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시장에서 돈을 지출하고 있을 때만큼은, 적어도 어떤 주인이 된 것만 같은 의식을 소비할 수 있었다. 그들의 물질적 결핍이나 부에 대한 갈망이 클수록 도시는 계속 확장되었다. 각종 생산 공장과 기반 시설을 마련하기 위해, 결국 메트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삼키는 블랙홀이 되었다. 날벌레들이 달빛인 줄 알고 달려들었던 조명처럼, 메트로의 유혹은 수많은 사람들을 미친 듯이 끌어당겨 검은 도시 속으로 빨아들였다. 메트로의 촘촘한 거대 신경망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었고, 익명의 주체들을 도시의 그물망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도록 묶어놓았다.  


메트로는 언제나 사람들의 발전된 미래를 비전으로 제시하였고, 지루할 틈 없이 일상의 스타일과 패턴들을 부지불식간에 변형시켰다. 온갖 유형의 감성과 유행들을 빠른 속도로 소비시켰고, 감각적인 탐미과 순간적인 쾌락을 통해 지친 사람들의 숨가쁨을 잊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휴식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였고, 자본주의는 사소한 시간과 은밀한 내면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값을 지불하며 소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전문성이나 노동 생산량이 삶의 양질을 가늠케 하는 척도인 것처럼 내세운다. 광산업자처럼 돈의 광맥을 곧 찾아낼 것이라는 환상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치열했던 경쟁들로 한바탕 난리 친 뒤에는 시대적인 낙오가 남았다. 아포리즘 같았던 광고 문구가 세력을 잃어버리자 추상적 감각만이 허전한 공간을 차지하고, 전에 느낄 수 있었던 현실감은 상실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풍미했던 분과 열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뚜렷한 실체도 없는 사진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인쇄되어 길거리 전단지로 배포되었다. 메트로의 거대 담론은 어떤 누군가의 소중했던 공간이란 개념을 지워버렸고, 누구에게나 열려있기만 하면 되는, 자유로운 공간 속에 함께 하였던 시간들을 망각시켰다. 그리고는 다시 새로운 익명들로 공간을 채웠다. 



레트로(Retrorespect)는 함부로 구겼던 종이를 다시 펼치 것이다. 단순히 기성세대로 하여금 추억을 소환케 하고, 새로운 세대에 낯선 문화를 소비케 하는 머물러 있지 않다.  뒷골목 어딘가에 묻힌, 과거에 흔했던 일상들을 꺼내는 것하찮았던 것들로부터 어떤 의미를 되찾으려는 다. 아마도 그것은 메트로에 사장되었거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삶으로부터 나온 절박함에서 기인했을 테. 과거를 재해석하고 현대성을 가미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다기보다, 자본에 종사하였고 시장에 지배당했던 사람들이, 꿈같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려는 다.


고물처럼 홀대받았던 옛날 영화, 음악, 카메라, LP 등 같은  거꾸로 찾아가는 일은, 바쁘게 뛰어가면서 꽃을 그저 스쳐 지났던 것으로 족던, 아찔했던 삶에 대한 반성이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내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지난 시절을 살는지 기억하고, 차분하게 따뜻한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보 미학적 또는 철학적 태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련되고 멋진 도시의 외관 어울 것 같지 않은, 촌스럽고 유행에 뒤처진 빈티지한 골목들을 사람들이 누비는 중이다.


매년 봄이 오면 지난 시간을 소환했던 레트로처럼, 메마른 가지 위에서 벚꽃들이 피어난다. 옛날에 보았던 벚꽃들과 다시 보모양들 전혀 다르지 않을 텐데, 어찌 된 일인지 벚꽃은 점점 더 화려해지는 것만 같았다. 내 삶의 청춘이 시들어 가기 때문인지 모른다. 과거 윤중로를 걸으며 벚꽃을 맞이했던 사람들이나 지금 같은 길을 고 있는 사람들, 모두 하나 같이 달콤한 향을 입술에 가득 물었다. 너와 나의 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될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일제히 벚꽃이 사그라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올해는  한 방울 떨어진 적도 없는데 벚꽃들이 지고 있었다. 벚꽃은 때가 되면 피었고, 때가 되어 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애먼 비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만약 우리의 추억이 개화하기 시작했다면 지금이 적기인 까닭이다. 메트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가 너무도 산적한 까닭에, 심지어 젊은 세대마저 과거를 소환해 겪어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시절을 음미하려 한다. 자신들의 모순과 정체된 현실을 읽으면서 말이다. 이제 곧 메트로에는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벚꽃처럼 사라져 간 것을 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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