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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프란츠 Apr 03. 2024

버드나무 숲

설렘 5

누군가 사무실 화분 흙 위에 '설렘'이란 글자가 적힌 돌멩이를 올려놓았다. 숫자 '5'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총 다섯 가지의 설렘들을 응축시켰다거나, 자신만의 희망 목록 중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설렘일 거란 추측을 해 보았다. 아무튼 달걀만한 화분돌에 설렘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보통의 화분과는 달리 각별한 의미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그 글자를 쓴 누군가만은 화분이 마르지 않도록, 꾸준히 물을 주면서 관심을 쏟을 것이다.


설렘이란 과연 무엇일까? 설렘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았다.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림 또는 그러한 느낌'이라 한다. 마음이 들떠 있다는 건, 내 몸과 마음의 간극이 커지고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빈틈이 클수록 차갑거나 따뜻한 바람에 쉽게 노출되고, 외부 공기의 흐름과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나의 틈을 열어두었다는 건, 밥을 지으면서 무언가 조급하게 고대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있었다는 것. 그럴수록 설익은 공깃밥이 만들어지기 십상이다.


설렘은 찰나의 시간에 사람을 순수하게 만든다. 그 대상을 바라볼 때, 많은 틈새가 생겼으면서도, 이질적인 생각이나 조악한 욕심 따위가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자석처럼 순수함을 바짝 끌어당긴다. 이제껏 한 번이라도 설레었던 적이 있다면 당신도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다. 아직도 순수함을 숭고하게 여기고 생각한다면, 언젠가 내 삶에 깊이 박혔던 쇠못에 촘촘히 에나멜선을 말아 전류를 흐르게 고 있는 것이다. 가끔씩 내 몸에 정전기를 느낀다면 누군가를 만나 비비고, 무언갈 문지르고 싶은 것인지도.    


일상의 뻔한 것들로부터 벗어났을 때, 설렘이 봄바람처럼 불어왔다. 어제 퇴근길, 햇살은 처마 끝에 걸린 물고기 풍경처럼 화사하고 아득한 빛이었다. 여의도 샛강다리를 건너다가 무심코 궁금해졌다, 다리 중간쯤 나있는 계단 난간 사이를 수시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까닭을.



5층 높이쯤 되는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다리 위에서 볼 때와 달리 군락을 이룬 수양버들, 실개천과 작은 연못 같은 것들이 자세히 보였다. 큰 물고기들이 얕은 웅덩이를 떼 지어 다녔고, 청둥오리들은 돌 틈에서 분주히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콘크리트가 없는 흙길은 적당히 폭신하고 말랑말랑했고, 나무에 붙은 촉촉한 이끼들이 푸른 향기를 내뿜었다. 길게 늘어뜨린 버드나무 가지들에선 형광색 전구처럼 연둣빛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정장차림의 어떤 남자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버드나무 숲길을 걸었다. 아빠 손을 꼭 붙잡은 여자 아이가 개나리처럼 샛노란 가방을 업고 새처럼 조잘조잘했다. 백발의 남자가 검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회색머리의 여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버드나무 숲에 사는 요정들처럼 저마다 무언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잖니, 마치 내가 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것처럼 설레었다. 적막하지만 평온한 안식 같은 게 가슴에서 벚꽃처럼 피었다. 순전히 우연히 일어난 발견, 늘 걷기만 했던 다리 위를 벗어났을 때 일어났다. 내가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이 거기 있었다.


설렘과 설움은 서로 다른 감정의 갈래길이 아니다. 같은 하나의 길 위에 있다. 처음 해를 맞이하는 것처럼, 낯선 길에서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가까이 다가가면 설렘이 찾아오고, 성글게 멀어지면 설움이 깃든다. 설렘은 봄의 꽃과 새싹같이 피어나는 마음이고, 설움은 가을의 낙엽처럼 무겁게 떨어지는 마음이다. 저만치 길 끝에 있는 걸 보았고, 거기에 있는 줄 알면서도 가지 못하고 망설이지는 게 있다면, 길 위에 누워있는 돌멩이와 풀들에게 물어보라,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이토록 아름다운 봄을 향한 나의 설렘이 설움으로 커질까 봐 벌써부터 두려워할 일인지. 지금은 내 생의 봄을 즐겨야 할 시간일 테니까. (그런데, 화분돌에 써놓은 글자는 '설렘'이 아니라 '셀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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