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방앗간 샛길을 빠져나가는 찰나였다. 한 남자가 등 뒤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찬 공기를 가르는 남자의 기침 소리는 전투기 소음 같았다. 발작처럼 기침할 때마다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제대로 뱉지 못한 숨이 그의 목구멍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줄기찬 기침에 호흡이 어지럽자 남자는 숨을 멈추었다. 다행히 기침은 가라앉은 듯했다. 남자가 날 쳐다보는 것 같았다. 모른 척하지 말라는 눈빛이었다. 그리고선 천천히 지팡이를 짚으며 내게 다가왔다.
"여보쇼, 여~보우~에엑~치!"
남자가 날 부르려다가 기침이 다시 도졌다. 좀 전 '여북치'라 들렸던 게 날 부르려던 소리였나 보다. 가까이서 본 남자 머리는 늦가을 된서리처럼 짧고 하얬다. 좁은 이마 사이로 구불구불 고랑이 깊게 파였고, 허리는 구부정한 채 다리 한쪽이 휘었다. 지팡이에 의지한 남자는 내 앞에 엉거주춤 멈추었다.
"여보쇼, 경복궁역 가려면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능교?"
억양이 아니었더라도 그가 이 동네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오전 8시, 이 시각 혼자서 불편한 몸을 끌고 비탈길을 내려온 사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경복궁역에서 지하철을 타려는지, 통인시장쯤 내리려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단단히 언짢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불안해 보였다.
"아무 버스나 타시면 돼요. 다 거기 가요."
그의 억센 소리 때문인지 나는 낙엽처럼 바짝 마른침을 삼켰다. 남자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어떤 버스라 했능교?"
"여기 버스는 다 경복궁역까지 가요. 그냥 아무거나 타세요!"
남자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어떤 복잡한 생각을 하는지 껌 씹듯 두꺼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가 생각을 곱씹을 동안 나와 남자 사이에 정막이 흘렀다.
"여, 택시는 없시요?"
대로변도 아닌 좁은 길목에서 난데없이 택시가 있는지 묻다니, 나는 호출앱으로 택시를 부를 요량이 아니라면 포기하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버스를 타고 가시는 편이 훨씬 빠를 거예요. 택시가 더러 있긴 한데 쉽지 않거든요."
"모라고 예?"
"길 건너서 버스를 타셔야 한다고요."
이번에도 남자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남자가 가는귀먹었다는 걸 알았다. 말귀를분간 못 하는남자가 들을 수 있게 더 큰 소리를 쳤다.
"따라오세요. 정류장 가는 길 알려드릴 테니."
횡단보도 점자블록 앞에서 남자는 초조히 신호를 기다렸다. 빨간불이 녹색불로 바뀌자 그는 인사도 없이 뛰쳐나갔다. 무엇이 남자를 그토록 급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그는 치렁한 바지단으로 횡단보도 흰색 선들을 지우면서 세 발로 걷듯 뛰었다. 녹색불 점멸 신호가 그의 보폭에 박차를 가했다. 남자는 크게 휘어진 활대처럼 구붓한 대각선을 그리며 횡단보도를 벗어났다.
그가 다 건너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길을 접고 와플가게 사잇길로 빠졌다. 과거 사잇길엔 숙주나물로 유명했던 치킨집이 있었다. 지금은 간판 없이 치킨 그림만 흔적처럼 남은, 좁은 길을 여울물처럼 미끄러져 내려갔다. 사잇길을 빠져나오자 좀 더 넓은 골목이 나왔다. 골목에는 구부러진 전봇대 하나가 정승처럼 오도카니 서 있었다. 거미줄 같은 전선이 매달린 전봇대는 겨울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 같았다. 구부러진 부위가 경추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 만났던 남자 모습이 연상되었다.
일상의 굽은 것들은 어떤 목적이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고등어 가시의 곡선은 파도를 거슬러 오르려는 것이고, 코끼리의 휘늘어진 코는 높게 있는 먹이를 따먹기 위한 것이다. 고압전류가 안전하게 흐를 수 있도록 전봇대가 꺾인 사연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그 무엇도 아무런 이유 없이 구부러지거나 꺾이지 않는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도 스스로 구부릴 줄 알아야 발톱도 깎고 양말도 신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아까 그 남자는 무슨 일이었을까?
나는 다시 굽어진 길들을 천천히 걷는다. 이 길에선 뛰지 않아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직선 도로와 달리 굽어진 길들은 자연에 가까운 모습이다. 날마다, 계절마다, 굽이굽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꼬불꼬불 길에서 마주치는 것들은 늘 생소하지만 행복한 설렘이다. 달음박질을 했더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
뻣뻣하지 않은 사람은 굴곡진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 삶의 굴곡이 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뜻밖의 사랑, 불쑥한 가련함, 차오르는 분노, 목메는 이별 등 수많은 감정들을 겪고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다. 그래서 굽어짐은 삶을 보다 유연하고 풍부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을 내게 안내해 줄 것이다. 나는 믿는다. 지금 내가 구부러지는 건 그래서라고.
차갑고 건조한 날씨 탓에 모래 한 줌 콧속에 뿌려놓은 것 같이 간지럽다. 환절기마다 촉발되는 비염은 참을 수 없는 존재여서 날 여북하게 만들곤 한다. 하지만 그래야 기침을 밖으로 뱉어낼 수 있다. 코 끝이 점점 더 간지러워지려고 한다. 꼿꼿이 굴지 말고 허리를 굽혀 기침을 하라는 신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