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식당과 CU 편의점 사이 창고 앞, 플라스틱 화분에 푸른 고수와 하얀 대파가 모심기하듯 나란히 심어졌다. 은빛 수저는 무엇이 좋은지 잔뜩 모래를 머리에 묻힌 채 웃고 있다.그것들은 누군갈 마냥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다리는 일이 그들의 의무인 것처럼묵언수행을 하는 건 아닐까.
계속보고 있자니'지혜의 고수인 미네르바처럼, 역경을 대파한 오디세우스처럼 살고 싶다'는, 얼핏 따분한 문장을 머릿속에 그려 본다. 그리고 내게 삶의 지혜란 게 있다면, 몽테뉴같이 멋진 문장과 메타포를 사용해떠오르는 영감을 써 내려가고 싶었다.
척박하고 거친 땅을 바득바득 딛고 자라난 옥수수처럼, 감동을 옹골차게 생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몽테뉴는 <수상록>을 통해우리가 얼마나 바보짓을 해 왔으며, 그렇게 말했는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나 역시 쓸데없는 과신에 빠져 그런 바보 같은 언행을 일삼았던 적이 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일들을 함부로 도모했다. 결과적으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타협점을 찾아 적당히 산출을 추슬러야 했다.그래서 지금 난, 아무것도 이루어낸 게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 기분이다.
종로를 가로지른 전차에 올라탄 윤동주가 말했던 대로, "타는 곳이 시점이고, 내리는 곳이 종점"일 뿐이어서, 내 마음대로 <종시(終始)>를 결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우유부단한 나는, 하루종일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터널 속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이토록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갈피를 못 잡는 것이다. 터널의 시작은 알아차렸으면서 그 끝을 몰라 어둠 속에 골몰한다.
결국 나는 형체가 막연한 그림자가 되어,차장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거나, 그러한 풍경들이 되어 스쳐갈 것이다. 나의 시종(始終)을 어떻게든 풀지 못한 채 과제로 남겨 놓고,치렁치렁 줄을 건 나무에게 운명의 향방을 알려달라고 주술처럼 중얼거린다.
글을 쓰면서 자꾸 나 자신뿐만 아니라 누군갈, 무언갈 더듬고 골똘하게 된다. 과연 어떤 연유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과 상호작용을 하다 보면, 나는 길을 잃고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아니다, 우로보로스*처럼 같은 원을 뱅뱅 돌고 있다. 허기진 욕망이나 메마른 감정을 채우려던 게 아닌데도, 헛발질로 애먼 콘크리트 바닥 긁는 소리를 냈다.아무도 궁금치 않은 걸 반드시 기억해 내려는 환자처럼,한데 바람에 몰골이 초췌한룸펜처럼 말이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다. "우리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선 무엇이 더 잘 보일까?
나는 자기 연민과 공포를 느끼며 카타르시스를 배설하려던 참이다. 비극 예찬론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라도 되고 싶었던 것처럼. 처음 고수와 대파를 번갈아 볼 때까지만 해도 낭만적인 감상에 부풀어 있었다. '아슴거리는 봄날, 따스히 내려앉은 햇볕, 한소끔 끓어오른 꿈결들, 오물조물 입 안 가득한 상쾌함과 비릿함, 기름진 삼겹살과 심심한 사랑 등'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비극적인 생각을 떠올렸다.
그들도 나의 세계와 다르진 않을 것인데, 글쎄다. 희극과 비극을 분간할 수 없는 혼재된 삶이지 않을까. 정확히 등분된 제한구역에 살면서, 희망했던 심지들을 채 올리지도 못하고, 날카로운 날붙이에 대가리들을 모조리 날렸으니 말이다. 나는 비릿한 바다 내음을 맡으려다가, 갑자스레 피 비린내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