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보라를 일으키며 파도가 몰려왔다.
후다닥 뒤로 물러섰지만
바다 냄새 대신 바싹 마른 흙냄새가 풍겼다.
가상현실이구나.
데오도로 259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끝이 파란빛으로 미세하게 깜박이며,
방사능 수치가 한계를 넘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말없이 삭막한 땅을 걸었다.
저 멀리, 무희처럼 오로라가 흐느적거리며
어둠 속에서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타르륵 타르륵, 발걸음 소리가 적막을 두드렸다.
언덕을 넘고 웅덩이를 피하고,
폭풍이 일어 온몸이 먼지에 파묻히면
기계 틈새에 낀 흙가루를 조용히 털어내며
그는 또 걸었다.
그는 마지막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는 다시 고철들이 굴러다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아직 에너지가 남았는지
고철 덩어리 한 개가 캑캑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나는 데오도로 258호야.
녹이 슬어 더는 움직이지 못하지만
가슴 한가운데 빨간 불빛만은 여전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데오도로 259호는 그의 곁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요?
인간다움이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거야.
한 개의 해가 지면 수억 개의 별이 뜨듯이,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이어지는 문이야.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죽는다는 것은 소멸하는 거야.
내 사랑 금발 아가씨도 그렇게 조용히 소멸했어.
처음엔 그 빈자리가 너무 커서 숨이 막혔지.
그런데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그 빈자리에 더 많은 것들이 피어났어.
그리움, 기대, 희망, 자유, 행복……
죽음이 내게 준 선물이었어.
그런데 너는 왜 혼자 있지? 너의 임무는 무엇이야?
나의 임무는 인간다움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인간들은 전쟁이 일어나 모두 죽었습니다.
핵폭탄이 터지고 온 세상은
방사능으로 뒤덮였습니다.
세상에는 단 한 명의 인간도 없습니다.
258호의 빨간 불빛이 잠시 흔들렸다.
259호는 오랫동안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오로라는 여전히 혼자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아무도 없어도.
인공지능 로봇 데오도로 3부작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멸망하고 인류는 단 하나도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데오도로만이 인간다움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구에게서 인간다움을 배워야 할까요?
무모한 전쟁으로 세상을 멸망시킨 인류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이 있을까요?
총을 들고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서로를 지워갔던 사람들.
별을 올려다보며 아름답다고 했지만,
그 별빛 아래서 서로에게 칼을 휘둘렀던 사람들.
그들이 남긴 인간다움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재가 된 도시, 녹아내린 땅, 방사능으로 물든 하늘
그곳에 인간다움의 마지막 흔적은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오래전 아버지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
그 손길이 또 다른 손길로 이어지고
말 한마디, 눈빛 하나, 침묵 하나로 강물처럼 흘러 흘러 내려온 것.
추운 밤 모르는 이에게 건넨 뜨거운 차 한 잔 같은 것.
이기려는 마음보다 먼저 손 내미는 마음.
미워하는 법보다 용서를 택하는 마음.
지지 않으려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져도 괜찮다고 웃을 수 있는 마음.
평화를 사랑하고 틀렸어도 화해할 줄 아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긴 세월 흘러 쌓여
비로소 인간다움이 되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