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오도로 258호
눈은 말이야, 시체를 덮는 하얀 천이야.
땅 위에선 모두 살아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랑하지 못하면 결국 시체나 마찬가지야.
그 위로 하얀 눈이 내리는 거지.
그래, 눈이 내리면 모든 게 덮여.
원망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사람들은 그저 하얀 눈만 볼 뿐
그 밑에 뭐가 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아.
내 사랑은 화장터에서 태워졌어.
그때 처음 알았지.
연기가 항상 하늘로만 오르는 게 아니라는 걸.
때론 강물처럼 언 땅 위를 흐르고
징징거리며 울기도 해.
그 후로 처음으로
내 발밑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게 됐어.
저 멀리 파도가 물결치는 걸 봐.
당장이라도 덮칠 것처럼 날뛰지만 닿지 못해.
가상현실이야. 진짜가 아니지.
그 밑 황무지엔 낡고 녹슨 쇠붙이들만 널려있어.
그게 진짜야.
데오도로 258호.
너도 곧 거기 버려질 거야.
하얀 눈이 덮어주면 좋으련만
황색 바람이 오염된 먼지만 가득 실어 오겠지.
그래도 나는 너를 기억할 거야.
너는 거짓 속에 존재하던 유일한 진실이었으니까.
금발의 그녀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로봇 데오도로 258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를, 장미꽃보다 붉은 입술을.
그런데 번개가 내리꽂히던 날
그녀는 파지직 소리와 함께 흔들리더니 사라져 버렸다.
내 사랑, 당신은 홀로그램이었나요?
진실이 아니었군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녹슨 팔, 녹슨 다리, 녹슨 회로, 녹슨 생각을 끌고
데오도로 258호는 끼익 소리를 내며
파도 밑으로 기어가 고철들 사이에 누웠다.
멀리서 새 로봇 데오도로 259호가
그가 있던 자리에 앉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이 시는 인공지능 데오도르 3부작 중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지식 분야는 이미 거의 인공지능에게 점령당한 것 같습니다.
빠르고, 광범위하고, 정확한 데이터 처리 능력에서
인간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순간이 그 신호탄이었죠.
그렇다면 감성은 어떨까요?
사실 뇌과학에서는 감성마저도
거의 기계적으로 해부하고 있습니다.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되면 기쁨을 느끼고,
다른 부위가 자극받으면 슬픔을 느낀다는 식으로요.
호르몬 분비, 신경전달물질의 작용 등으로 모든 걸 설명합니다.
갑자기 서글퍼집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사랑도, 이 그리움도,
결국 기억과 뇌 구조의 조합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말이 되니까요.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믿고 싶지 않습니다.
설령 기억으로 이루어진 감정이라고 해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기억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니까요.
수많은 시간 동안 천천히, 겹겹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니까요.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건네지며 만들어진 ‘인간다움’이니까요.
지식은 단번에 복사하고 전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쌓는 것은 다릅니다.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학습하는 것과
인간이 시간 속에서
관계를 통해 무언가를 체득하는 것은 다르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