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가는 날이다.
소주 박스 어깨로 나르던 아버지
오십견이 왔단다.
더는 짐을 지지 못한단다.
그래서 열세 평
반지하방으로 이사 간다.
오래된 책, 귀한 LP판, 전축,
그리고 자존심
다 버리고
절망한 나의 넋을 주워
박스에 담는다.
어린 시절, 이사는 늘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인이 월세를 올린다고 했고, 때로는 그냥 나가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 시절, 저는 그저 울기만 했습니다. 왜 또 짐을 싸야 하는지, 왜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지, 왜 익숙해진 골목을 떠나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사를 거듭할수록, 박스를 쌓아 올릴수록, 저는 점점 부모님의 등 뒤에 숨겨진 무게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소주 박스를 나르시던 그 어깨에 실린 것은 단순한 짐이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었고, 무너지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낡은 이불을 개며 흘리던 한숨 속에는, 우리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좌절과 미안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동심을 잃는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요?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노력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날들이 있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습니다.
이제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쉴 곳이 생겼고, 짐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이 남아있습니다. 세상일이란 알 수 없으니까요. 언제 또다시 박스를 꺼내 들어야 할지, 언제 또 낯선 골목을 헤매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려고 애씁니다. 오늘 하루 평온했다는 것, 비가 새지 않는 천장이 있다는 것,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동시에 욕심도 생깁니다. 더 이상 떠밀리지 않는 삶, 버리지 않아도 되는 삶,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삶을 꿈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