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0. 왕이메서 놀기
2월 거문오름 근무가 웬일이지 월초에 몰려 있었다.
그래서 월말 쯤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화창한 봄볕만 하릴없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무려 오늘 날씨가 23도 란다.
거의 초여름 날씨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가벼운 차림으로, 가방 하나 메고 무작정 나왔다.
‘어디로 갈까?’
우선은 마트에 들러 막걸리 한 병과 도너츠 몇 개를 샀다.
이미 가방 안에는 귤 몇 개와 막걸리 마실 잔은 들어 있다.
가까운 친구 한 사람에게 전화했더니 오늘 선산에 봄벌초하러 간단다.
‘참 부지런도 하구나! 그럼 어디로 가 볼까?’
전에 동료 해설사에게 듣기로는 봄꽃은 왕이메 오름이 가장 좋다고 한 말이 생각났다.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는 오름이었다.
‘한 번 가보자. 가서 못 찾으면 그냥 오면 되지’
정말 이렇게 가는 길은 부담이 없어 좋다.
못 찾아면 그냥 돌아 오면 되니까.
가끔은 혼자 육지에 가서 돌아다니다 올 때가 있었다.
그때는 심심하고 적적했지만 지나고 보니 가장 기억에 남는 여정이 되곤 하었다.
카카오맵으로 검색을 해 보니 ‘새별오름’ 맞은 편이었다.
정류장도 그 근처에 있었다.
‘새별 오름에서 내려 길을 가로질러 가면 되겠구나!’
시외버스 터미널에 안내소에 가서 물어보았다.
“새별오름에 가려면 몇 번 버스 타야 되요?”
안내원이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다 알려 준다.
그리고는 덧붙인다.
“40분 후에 출발합니다!”
어이쿠! 너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구나!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많이 남을 리가 없는데.
거의 20분에 하나 있는 버스가 40분 이후라니.
그냥 개찰구로 갔다.
시외버스에 앉아 있는 버스 기사에게 물어 보았다.
“이거 새별오름으로 가나요?”
버스 기사는 나를 쳐다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네, 갑니다”
“몇 분 후에 출발인가요?”
“5분 후에 출발입니다.”
이건 뭐야? 40분 후에 있다더니.
의심이 나 다시 물어 보았다.
“이 차 새별오름에서 정차하지요?”
버스 기사는 여전히 나를 처다 보지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버스는 진짜 5분 있다 출발하였다.
안내원 말 들었으면 괜히 35분 낭비할 뻔 했다.
속으로는 은근 화도 났다.
뭐 35분이 대단한 시간은 아니지만 혼자 앉아 무료하게 기다리기엔 너무 아까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버스가 가는 동안 다소 불쾌했던 마음은 사라졌다.
차창 밖으로 보는 봄 풍경이 너무 따사로웠다.
버스는 평화로 가운데 도로로 가지 않고 옆 길로 가면서 가는 곳 마다 세웠다.
대부분 세우는 곳은 중산간 마을로 가는 길 어귀였다.
그 어귀 너머로 보이는 중산간 마을이 정겹기만 하다.
애월읍 출신인 나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마을들이었다.
버스가 설 때 마다 연세 지긋한 분들이 내리고, 오르곤 했다.
하나 같이 나처럼 느긋한 표정들이었다.
이런 것이 평화일까?
새별오름에서 내렸다.
길 건너 남쪽을 보니 오름 세 개가 보였다.
어느 게 ‘왕이메’일까?
두리번 거리는데 새별오름 어귀에서 공사하시는 분이 나에게 다가왔다.
잘 됐다 싶었다.
“저 오름이 왕이메인가요”
그런데 그 분이 아예 손사래를 친다.
“아이고! 나신데 묻지 맙써! 난 아무것도 모릅니다”
내가 무안해 하니 덧 붙였다.
“하도 오는 사람들이 물어 보는데, 난 이 동네 아무 것도 몰라 마씸”
할 수 없지. 모른다는데.
그래서 다른 걸 물어 보았다.
“그럼 이 길을 건너려면 어디로 건너야 해요?”
그건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앞으로 쭈욱 갑써, 가다 보면 굴다리 보입니다. 한 참 가야 할텐데”
가르쳐 주는 데로 가는데 굴다리는 안 보였다.
다시 카카오 맵을 보니 아직도 한참이었다.
‘걸으려고 왔으니 걸어 보자. 가다 보면 나오겠지’
맘 편하게 먹고 가다 보니 드디어 굴다리가 나왔다.
길을 건너자 다시 막막했다.
‘자 이젠 어디로 가야하지?’
그 때 다시 지도를 봐야 했었다.
아님 카카오 내비를 켜던가.
안경을 꺼내고 하는 게 싫어 대강 그냥 서쪽으로 갔다.
저 멀리 버스 정류소가 보이고 나이 드신 남자 한 분이 보였다.
‘아! 저기 가서 물어보면 되겠구나!’
빨리 걸음을 재촉하였다.
내가 가기 전에 버스가 와 가버리면 안 되니까.
다행히 내가 갈 때까지 그 분이 탈 버스는 오지 않았다.
“왕이메 가려는데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난 그 분이 연세가 지긋하니 그곳 지리를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분도 좀 전의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왕이메? 나 그런 이름 처음 듣는데”
그럴 리가.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이 모른다?
내가 카카오맵을 보여 드렸으나 여전히 고개만 저었다.
버스가 오고 그 분은 가 버렸다.
진작에 할 껄, 할 수 없이 카카오 내비를 켰다.
그런데 카카오 내비는 반대쪽으로 가리켰다.
‘내가 너무 서쪽으로 왔구나?’
다시 반대쪽으로 걸었다.
진짜 한 참을 걸어가다 보니 입구가 보였다.
입구에서는 2km나 더 들어가야 했다.
이미 등에서는 땀이 촉촉이 배이고 숨도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할 순 없다.
포장도로를 따라 쭈욱 올라갔다.
내비에서는 가까워진다는 음성멘트가 계속 나왔다.
속으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다 보니 7-8명의 등산복 차림의 일행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나처럼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인가 보다.
모두들 값비싼 등산복을 울긋불긋 차려 입었다.
드디어 입구가 보였다.
어디 앉을 자리라도 있으면 가져온 막걸리나 마시고 갈텐데, 앉을만한 자리도 없었다.
그냥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안내판이 있었다.
분화구로 가는 길과 둘레길이 표시되어 있었다.
일단 왔으니까 분화구에는 가 봐야겠지.
분화구로 가는 길을 짧았다. 금새 능선에 올랐다.
능선에는 다시 오른쪽 길과 왼쪽 길이 있었다.
내가 바라보니 왼쪽 길은 올라가는 길이었고, 오른쪽 길은 내려가는 길이었다.
아까 고생하면서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더 이상 올라가긴 싫었다.
오른 쪽으로 천천히 내려가면서 봄꽃이 어디 있나 살펴 보았다.
아무 것도 안 보였다.
그러니 혼자 오지 말고 아는 사람과 같이 올걸.
오늘 겪은 일을 말하면 사람들은 얼마나 웃을까.
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 길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말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다소 질척거리는 길을 따라 왼쪽 길로 내려가다 보니 등반객 몇 사람이 보였다.
한 여자 분이 뭔가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 이쁘다! 너무 귀여워!”
노루귀가 세 송이가 피어 있었다.
난 아는 체 하고 싶었다.
“무슨 꽃이예요?”
난 그녀가 당연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을 틀렸다.
“새끼 노루귀예요. 귀엽죠?”
아차! 의문의 1패!
모른다고 하면 ‘노루귀예요!’ 하고 잘 난체 하려 했는데, 그 분은 ‘노루귀’라고 하지 않고 ‘새끼 노루귀’라고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들어가니 더 없이 아늑한 분지가 나왔다.
들어가는 반대쪽으로는 높은 산체이고 내가 들어 온 곳은 낮은 분화구였다.
어디선가 어린애가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저처럼 어린 애들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다정한 목소리는 어린 애들이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일거고.
들어가 보니 두 여자 아이가 엄마와 놀고 있었다.
큰 애는 초등학교 1-2학년 정도? 작은 애는 한 서너 살쯤 되었을까?
둘이는 키 작은 숲 사이로 숨박꼭질 놀이를 하고 있었다.
작은 애는 계속 언니보고 계속 놀이를 하자고 졸랐다.
그러면 착한 큰 애는 마다 하지 않고 동생과 놀아 줬다.
엄마는 그런 자매를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근데 저 어린애가 어떻게 여길 올라 왔을까?
난 마른 새(띠)위에 가방을 풀고 앉아 막걸리와 귤, 도너츠를 꺼냈다.
한 잔 마시고 나니 나 혼자만 먹는 것이 멋쩍어졌다.
그래서 귤 하나를 들고 큰 애에게 줬다.
큰 애는 다소 주저하다가 내가 몇 번 권하니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받아갔다.
이번에 작은 애에게 도너츠를 하나 권했다.
그런데 엄마가 말렸다.
“얘는요! 주는 데로 먹어서 골치예요. 지금도 비만이예요”
아닌데!, 비만은 아니고 통통해서 귀엽기만 한데.
애는 무척 섭섭한 듯 엄마를 쳐다 봤다.
괜히 그 애를 갈등하게 만들었구나!
멋 적어서 막걸리 병을 찍어 거문오름 해설사 단톡방에 올렸다.
금새 댓글이 올라왔다.
“아니 이럴수가~~ 혼자 술을~~ 그것도 낮술을~~ 마음 보탭니다”
“술맛 좋으시겠습니다. 사는거 별거 아니지요!”
보면서 혼자 낄낄거렸다.
조금 있으니 왼쪽 숲에서 집채만한 사내가 나타났다.
목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서.
그 사내가 나타나자 어린애들이 “아빠!”하고 달려 들었다.
‘그럼 그렇지, 이런 듬직한 아빠가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지’
내가 그 아빠에게 물었다.
“좋은 사진 많이 찍으셨어요?”
“아~ 네, 근데 눈이 다 녹아서, 너무 늦게 왔나 봐요”
아마 눈 위에 핀 ‘얼음새꽃’을 찍으러 왔는데, 눈이 다 녹아버린 모양이었다.
“어느 쪽에 꽃이 많은가요?”
“그냥 이 숲 속으로 들어가면 지천이예요”
그 분의 말대로 ‘키 작은 나무’ 숲 속으로 들어갔다.
와하~~!
세상에 이럴수가!
천상화원이 바로 이런 곳인가?
‘한라가는얼음새꽃’, ‘새끼노루귀’, ‘변산바람꽃’이 서로 엉켜 무리로 피어 있었다.
몇 몇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저마다 커다란 카메라에 접사렌즈를 달고 있었다.
나만 알뜰폰 신세였다.
‘약정기간 끝나면 빨리 좋은 걸로 바꿔야지’
그 분들이 사진 찍는 모습은 차라리 경건스러울 정도였다.
한 번 찍고는 화면을 보고, 이번엔 다른 각도로 찍고, 다시 화면을 확인하고.
나처럼 대강 한 장 찍는 게 아니라 만족할만한 사진이 나올 때까지 이리저리로 방향을 틀면서 찍었다.
마치 '인디언 기우제'처럼 기대치가 나올 때까지 쉼이 없었다.
나처럼 대강 사는 부류가 아닌 것 같았다.
난 이들과는 다르게 서툰 솜씨로 몇 장 찍고 다시 숲 밖으로 나왔다.
그 귀여운 어린애들은 뭐가 즐거운지 여전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와~~! 진짜 대단한 곳이네요”
내가 감탄하자 여자 분이 내게 알려 준다.
“쩌어기 북돌아진 오름은 더 좋아요!”
“그래요?”
돌아오는 발길은 너무 가벼웠다.
막걸리 탓인지는 몰라도 오전에 불쾌했던 마음과 고생했던 것이 싹 사라졌다.
멀리 보이는 바다가 초록색으로 마냥 싱그럽고, 봄 바람은 부드럽게 내 솜털을 간질러댔다.
내가 이 세상을 하직하고 서천꽃밭으로 나아갈 때도 이런 날, 이런 길, 이런 날씨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