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노동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칸다 포에버 Dec 11. 2023

운전실에서 본 풍경

노동요 - 철도 인생

전철을 타면 재미있었던 것이 의자에 앉았을 때 등 뒤로 탁 트인 창문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재빠르게 지나가지만, 역과 그 주변의 풍경을 보면 금방 시간이 지나갔다. 곳곳마다 나무와 건물의 모양이 다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강이나 하천도 가끔 나오면 왠지 모를 시원함을 느끼기도 했다. 또 전철을 자주 타면 풍경이 눈에 익고 기억에 남아 안내 방송 없이도 내가 어디쯤 왔는지도 대충 헤아릴 수 있었다.


승객으로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측창이 대부분이다. (요즘은 운전실까지 트인 전철도 일부 있어  열차의 전면과 후면 창문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전철차장으로 일하면서 나름의 특권이라고 한다면 풍경을 넓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옆으로 보나 앞으로 보나 뭐가 다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불편하지 않게 정면으로 바라보면 더 잘 보인다. 물론 구경만 하는 것은 아니다. 늘 전면을 기관사가 응시하며 운전하듯 전철차장은 후부를 계속 감시해 선로나 전차선, 승강장 등에 이상이 있다면 관제에 보고해야 한다.


노선을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늘 같은 곳을 다니니 지겹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항상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계절마다, 아침과 낮, 저녁마다 볼 수 있는 모습이 달라서 그 변화에서 느껴지는 신기함이 있다. 눈이나 비가 내릴 때 와이퍼로 창문을 닦아내며 보이는 풍경과 오묘한 감정, 칠흑 같은 어둠이 하늘을 덮었을 때 밝게 빛나는 건물 이곳저곳의 불빛, 아침을 밝히는 해가 서서히 떠오르며 보이는 한강, 뭐 하나 없을 때 나 홀로 달리는 휑한 길. 그리고 어느 때든 열차를 기다리며 자기 목적지를 가려는 사람들. 항상 같아 보이면서도 늘 새롭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부지런하다. 어디를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말 바쁘다. ‘이때는 별로 없겠지’라고 생각할 만한 시간대에도 줄을 서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생각한 나인데 그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반성하게 한다. 그리고 더 열심히 살자는 동기부여를 받는다. 무게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게 가볍든 무겁든 각자 삶의 무게를 지고 열차에 탄다. 무슨 생각과 마음가짐일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목적지에 가려는 그들을 보며 가끔은 책임감이 생길 때도 있다.


하지만 기차의 속도가 빠른 만큼 우리가 보고 지나치는 것도 순식간이다. 그렇게 세월도 빨리 흘러간다. 옆을 볼 여유도 없이 우리는 앞을 보고 달려간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보면 놓친 것이 많아 보일 때도 있다. 모든 것을 안고 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인간이고 우리의 욕심인 것 같다. 놓칠지라도 조금이라도 둘러보는 여유를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전철차장을 하며 느낀다.


예전에 KBS <다큐멘터리 3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구로역을 촬영한 내용이 있었는데 여기서 한 승객의 인터뷰가 참 인상적이었다. “기차를 타고 뒤를 돌아보면 굽이져 있는데 타고 갈 때는 직진이라고밖에 생각 안 하잖아요. 저도 반듯하게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뒤돌아보면 굽이져 있고. 그게 인생인 거 같죠. 앞으로도 굽이져 있을 것이고.” 직선 같은 지하철 구간도 곡선과 직선의 연속이다. 우리네 인생과 밀접하면서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전철 아닐까.


지금까지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승객은 두 할머니였다. 창동역에서 내린 이 두 할머니는 길을 떠나지 않고 계속 열차를 향해 장난을 치고 있었다. CCTV를 보며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열차 안의 누군가에게 계속 ‘메롱’을 하고 있었다. 아마 열차를 타고 더 가야 하는 친구에게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어린 소녀 같은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세월이 흘러 외형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사람 자체는 한결같은 것이 인간의 또 하나의 매력이다. 굽이진 길을 살다 가겠지만 나란 사람을 고 즐겁게 사는 것. 인생이라는 구간을 사는 우리의 방법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철차장의 선택의 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