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참 가식적이야.” “넌 참 배려심이 강한 사람이야.” 가식과 배려. 이를 구분하고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대중교통에서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면 온전한 공감을 통한 ‘배려’의 측면에서 행동할지 아니면 한국의 예절 문화에서 비롯한 반강제성에 의한 ‘가식’의 측면에서 행동할지는 각각의 개인에 따라 다르다. 보통 배려는 내가 결정하고 선택했을 때 나타난다. 가식은 내 결정과 선택에 타인에 대한 눈치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식이든 순간의 선택과 결과를 오롯이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은 행위자다. 이를 바라보는 사람도 배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올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섣불리 판단할 때가 많다.
현실 안에 있는 사람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타고 있는 사람은 그 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 배가 어디로 향하는지, 배는 어떻게 생겼는지, 속도는 어떤지 등을 알기 위해서는 배에서 벗어나 배를 바라봐야 한다. 정체 중인 도로의 차에서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왜 이 도로가 정체 중인지, 어디부터 체증이 해소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헬리콥터를 타고 그 위에서 관찰한 사람, 여러 CCTV를 통해 문제점을 찾는 사람들은 어디서 문제가 발생했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을 현실 밖으로 내몰아 현실을 관찰하고 비판할 줄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다. 정체된 차 안에 갇혀, 욕지기하며 짜증 내며 분노만 하는 사람들은 지식인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좀 더 멀리서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것을 권하면 주저한다. 지금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진다면 자신이 비워놓은 자리를 타인이 차지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리 잡은 채로 점점 자신의 범위를 늘려 집단을 구성하고 그 몸과 힘을 키워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한다. 힘은 강할지라도 시야가 좁은 이들은 현실을 바로잡을 안목과 능력이 부족하다.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지식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체하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을 관찰하려 하는 용기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주인공 닉 캐러웨이의 아버지는 어린 닉에게 충고한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닉은 아버지의 말을 들은 후로 타인에 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경향이 생겼다고 말한다. 우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미뤄야 한다. 이 사람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무엇이 부족하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나의 기준으로 순간적으로 판단하거나 바로 잡으려 하지 말고 자리에서 물러나 한 번 더 그들의 입장을 보고 듣고 생각하려 해야 한다. 이 세상을 사는 모두가 각자 다른 삶을 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