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으로 자연스럽게 살지 못하고 언제나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상태를 슈드비 콤플렉스라고 한다. 이 콤플렉스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삶의 중심에 두면서 살 때 시달리기 쉽다. 원하는 목표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안달하게 되고 뒤처진다는 생각하면서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의 삶을 돌아보면 내가 그랬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이를 하지 않거나 내가 원하는 빠르기로 진행되지 않으면 불안해졌다.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회피하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남들 앞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하지만 속으로는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며 마음 졸이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해야 한다고 여겼던 일 중 대부분은 내가 바란 속도보다 천천히 해도 되고 미루거나 심지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기다리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기다리는 법은 오랜 시간 배움과 훈련을 거듭해야 하는 것인가 보다. 삶에는 항상 기다려야 할 때가 있고 그때마다 배워야 했다. 오늘 나는 전자레인지가 음식을 데워주는 시간 30초를 기다렸다. 오늘 나는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기를 잠깐 기다렸다. 오늘 나는 집에서 나와 버스와 전철이 오기를 기다렸다. 모든 순간 나는 기다리고 기다린다. 왜 기다려야 할까. 아마도 내가 뭔가를 세상에 바란다면, 그것이 내게 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 시간을 세상에서 말하는 ‘효율’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게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견뎌야 하는 일이었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끝없이 기다리는 것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기다리는 대상이 내게 필요하다기에 해야만 하는 일종의 체념 같았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다리는 것을 무의미하고 비효율인 부정의 대명사로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기다림의 가치는 그 기다림이 끝났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기다림의 가치는 무엇을 어떻게 기다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다림 끝에 만날 그것의 가치는 기다리는 시간의 가치에 비례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기다리는 순간을 고통의 시간이 아니라고 여기기로 했다.
여전히 나는 할 일이 떠오르면 가슴이 뛴다. 하지만 기다리는 여유를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겉보기에는 의지가 약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꼭 내가 먼저 달려가지 않더라도 내가 기다리는 것이 나를 찾아오기도 할 때가 있다. 서둘러 나서서 대상을 만나는 것도 방법이지만 천천히 나서서 적정한 선에서 나와 기다림의 대상이 안정감 있게 만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