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 삶의 목표가 뭔지 물을 때면 대상이 뭐가 됐든 어떤 방법이든 돕고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말만 그랬지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있는지 떠오르지 않아 남몰래 부끄러워하며 살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갠 다음 날이면 길가에 지렁이가 꿈틀대고 있다. 사람도 햇볕이 뜨거워 걸음을 재촉하는데 무슨 일로 지렁이는 바깥으로 나와 움직이고 있는 걸까. 햇빛 들어오지 않는 땅속이 훨씬 시원할 것 같은데 말이다. 흙과 가까운 곳도 아니고 길 한가운데에 있는 게 얼마 못 가 누군가에게 밟혀 죽거나 태양열에 말라죽을 것 같아 나뭇가지로 건져서 흙으로 옮겨줬다. 땅을 기름지게 하니 내가 직접적으로 받은 건 없어 보여도 나름의 감사 표시를 한다는 생각이었다.
며칠 뒤 밖을 나섰을 때 지렁이가 길가에 또 있었다. 이번에는 죽어있는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개미들이 땅을 뚫고 올라와 지렁이의 살을 뜯으며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몇몇은 아직 살아 있어 쉴 새 없는 개미의 공격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내가 지렁이만 찾아다니며 옮기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옮기지 않아 그런 일을 당한 건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지렁이를 옮기려는 찰나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렁이를 그냥 두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자리를 옮겨주는 게 맞는 걸까?’ 지렁이의 자리를 옮겨준다면 지렁이는 더 살 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개미는 식량을 잃어버린다. 반대로 개미가 지렁이를 식량으로 활용하도록 둔다면 지렁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일이 누군가에게는 안 좋은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내 마음대로 하기도 어려워졌다. 도움이 도움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내가 선행이라고 생각하고 했던 일이 선행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심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같은 기준, 가치관으로 움직이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선행을 하게 되면 내가 뭔가를 바라는 생각에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판단과 동시에 몸이 움직이는 것은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움직이려는 데 망설이고 일부러 무시한다면? 그래서 마음에 걸린다면? 이것이 ‘양심에 찔린다’라는 것이라면 비슷한 상황을 겪어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계속 상기될 것 같다.
선택의 상황에서 하나를 택하고 택하지 않은 것을 포기한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기회비용인데 이를 최소화했을 때 가장 경제적인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인생의 모든 일을 경제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험 같은 정답을 택해야 하는 때는 있지만 답 없이 선택지만 여러 가지 놓여 있는 때도 많다. 내 선택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타난다. 이를 평가하는 것은 각자의 가치관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은 살아 있는 지렁이는 옮겨주고 주변에서 개미가 분주히 움직이는 지렁이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냥 두고 있다. 작은 일 덕분에 앞으로 더 선택할 때 선택 장애가 심해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기도 한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잃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나다운 선택으로 후회하지 않고 계속 돌이켜 생각하게 된다면, 나은 방법을 모색하는 삶을 산다면 덜 후회하고 더 나은 선택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