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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소회

by 와칸다 포에버

새로운 해, 다시 생일이 돌아왔다. 이제 생일은 설레는 날이 아닌 365일 중 하루로 여기고 있다. 하루 편하게 보내고 다시 하루를 맞이한 것에 감사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맛있는 음식과 축하의 선물 이런 것도 사치고 부담이다. 힘없는 낙엽까지 벌벌 떠는 말년 병장처럼 모든 것이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바로 나에 대한 것이다.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나와 남들의 삶이 비교된다. 지금껏 살아오며 느껴왔지만, 나는 삶의 진행이 누구보다 느리다. 결혼하고 집과 차를 사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따라잡는다고 욕심을 낸다면 무리해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각자 삶에 다른 박자와 속도가 있다고 하지만 내 박자가 정박인지 의문이 내 삶 가운데 항상 있었다. 그렇다고 내 박자가 아닌 남 따라 했다가 엇박자가 나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박자는 정박만 있는 게 아니고 엇박자도 있다. 4박자, 16박자처럼 다양하기도 하다. 남에게 엇박자로 느껴지는 것이 내게는 정박일 수 있고 그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나는 내 삶을 내 흐름대로 사는 것인지 아니면 남의 시선에 맞춰 내 흐름을 조절하는 것인지 자문하게 됐다.


마침, 올해는 음력으로 생일을 쇠는 엄마와 생일이 맞았다. 조촐하게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다. 누나가 엄마께 생신 축하 선물로 꽃을 사 왔다. 폼폰이라는 이름의 국화였는데 생긴 것이 마치 샤워 볼 같았다. 포장된 채로 그대로 뒀다면 오래 살지 못했을 꽃을 병에 담아 꽂으니 3주를 더 살았다. 제명보다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점점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태어나 죽는 것은 모든 생물의 순리다. 나도 꽃으로 치면 결국 시들 것이다. 사람이 시드는 것을 외형, 나이만으로 결정할 수 있을까. 순리라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더 오래 삶을 유지할 수는 없을까. 병에서 더 활짝 폈던 국화처럼 생기를 띨 방법은 있다. 어느 환경, 상황에 있느냐,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


회사 축구 동호회에서 자주 경기를 하는 운동장에 가면 할아버지 축구단이 우리보다 앞 시간에 경기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들은 말로는 단원이 80, 90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내가 저 나이면 달리지도 못할 것 같은데 할아버지 선수들은 열심히 달린다. 어린 세대보다는 현저히 느린 속도지만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한다.


경기가 끝날 때쯤 내가 몸을 푸는데 한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자기 연습과 내 준비 운동을 핑계로 공을 주고받자고 해서 함께 했다. 적당히 하다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가 먼저 지쳐 있었다. 꽃으로 비유했을 때 외형으로 따지면 할아버지가 나보다 더 시든 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년이라고 정해진 대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물리적인 시간이 있을 테고 순리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어떻게 사느냐,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 만개의 정도, 기간은 달라질 수 있다.


남들보다 못난 것 같고 부족해 보여도 흔들릴 필요 없다. 내 삶을 살아야 한다. 나를 돌보기도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시간은 빨리 간다. 아까운 곳에 낭비할 수 없다. 더 활짝 핀 꽃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나는 하루를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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