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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May 15. 2020

누군가의, 누구나의 거울

버프 제대로 걸린 남자의 열정

병역의 의무를 마친 지 얼마 안 된 청년 대다수에게는 알 수 없는 힘이 생긴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초심을 잡겠다는 의지, 고도의 집중력, 강제로 길러진 체력 등 이런 효과는 게임 속 캐릭터의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버프’와 비슷하다. 현실에서는 이 효과를 ‘군 버프’라 부른다.


족구왕


만섭(안재홍)은 갓 군 복무를 마친 복학생이다. 거울이 비추는 만섭의 모습은 파릇파릇한 20대 초중반의 남자다. 2년 가까이 국가에 헌신하고 원점으로 돌아온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이 새로운 사람. 하지만 세상이 비추는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다르다. 세상은 만섭에게 긍정적이지 않다. 옷을 입는 모양, 그가 바라보는 시각까지. 단지 여자 친구가 사귀고 싶고 족구가 하고 싶은 그가 한심하다. 하지만 누구도 순수하고 순진한 그의 자신감을 꺾을 수는 없다. 군 버프가 그렇다. 지속시간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발동하면 웬만한 시련이 아니고서는 지치지 않는다.



형국(박호산)에게 만섭은 자기의 과거형이다. 지금은 아무도 쉽게 말 걸지 않고 식품영양을 전공하지만,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고학번 화석이지만 예전에는 족구 하나에 미쳤던 사람이다. 덕분에 취업도 못 하고 여자 친구마저 잃었다. 형국에게 군 버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기숙사 룸메이트 만섭은 과거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래서인지 형국은 만섭에게 차갑게 대한다. 예전 자신의 모습을 만섭이 보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만섭에게 다 집어치우고 공무원 준비하라고 핀잔을 준다.



강민(정우식)은 방황 중이다. 학교 모델로 활동을 해도 주변 여자들의 인기를 얻어도 허전함에 답답하다. 청소년 국가대표 축구 선수로도 활동했지만, 부상으로 관둔 후 되는 일이 없다. 이런 이들에게 군 버프는 전혀 효과가 없다. 터닝포인트가 필요하지만 찾을 방법이 없다. 여자 친구가 자기보다 한참 떨어져 보이는 남자 만섭과 만나는 걸 보니 참을 수 없다. 게다가 그런 만섭에게 1대1 족구 시합까지 지니 자존감은 바닥을 친다. 강민에게도 만섭은 거울이다. 꼴 보기 싫은 모습을 자기를 계속 비추는 거울. 그런 거울은 보고 싶지 않고 깨부숴야 하는 목표가 된다.



다양한 삶을 사는 이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은 족구다. 교내 체육대회의 종목인 족구 시합 하나에 매진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고민과 걱정이 없다. 단지 신나게 땀 흘리며 포기 않고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나만 있을 뿐이다. 족구는 원점의 목표 의식 가득했던 나를 비춰준다. “근데 이거 우승해서 뭐하노?” “소개팅 좀 들어오겠죠?” 해병대 팀의 마지막 대화가 허무하지 않고 미소를 짓게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현실에서 만섭이었던 대부분의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 형국과 강민이 된다. 세상 속 다양한 요소에 부딪히면 그렇게 되는 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 아쉽다. 만섭이 주인공이기에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만섭이만큼은 끝까지 만섭이의 모습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형국과 강민에게도 응원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각자를 비추는 거울이 아름답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족구왕>은 누군가의, 누구나의 거울 같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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