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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칸다 포에버 Nov 03. 2020

대학 생활을 돌아보며

저녁 7시 즈음 TV를 켜면 ‘논스톱’이라는 시트콤을 통해 대학생의 재미있는 일상을 볼 수 있었다. 자유로운 TV 속 대학생들의 모습을 보며 ‘나에게는 어떤 일이 생길까?’ 기대하고 ‘나의 대학 생활’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20대를 기다렸다. 주변으로부터 “저렇게 대학 생활하는 사람은 없다. TV 볼 시간이 있으면 공부하라.”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은 “고교 3년만 참고,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거 자유롭게 하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 말을 따라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대학에 합격했다.


마침내 선생님들이 말한 결승점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출발선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전보다 더 심한 경쟁이 있었고, 더 많은 고민거리가 생겼다. 자유로운 공부, 나만의 시간 같은 여유가 주어질 것 같았던 대학교는 고등학교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더 높은 학점을 위한 경쟁은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한 내신 경쟁 같았다. 대기업에 취직한 학생의 수를 홍보하며 경쟁하는 대학교의 모습은 유명한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의 이름으로 플래카드를 걸어 놓는 고등학교의 모습 같았다.


나는 뒤처져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학점, 스펙 등 내 몸집 불리기에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며 뒤따랐다. 하지만 대학은 학생들에게 경쟁에 참여하기 위한 참가 자격을 요구했다. 등록금. 한 학기 등록을 위한 금액을 확인하면 한숨이 먼저 나왔다. 좋은 성적으로 성적 장학금을 받아도 내가 열심히 하는 이 공부가 장학금을 위한 것인지 내 발전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갈수록 대학교의 등록금은 줄지 않지만, 대학교의 강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또 대학교 속 아름다운 조형물과 건물은 늘어나지만, 대학교의 학과 수는 줄어들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대학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 이론과 응용 방법을 교수하고 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한다.’라는 의미가 있는 대학이 그 기능을 제대로 하는 것인가? 대학이 자본에 종속된 것은 아닌가. 나는 비싼 재룟값을 스스로 내어 대학이라는 공장을 통해 남들과 똑같은 모양, 기능을 가진 상품이 되어 기업이라는 소비자에게 팔리기를 바라는 게 아닌가.


의문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지만 결국 많은 이들이 학자금을 대출해서라도 등록금을 내어 한 학기 등교를 결심한다. 대학교를 나와야 사회에서 조금은 인정받을 수 있으니까. 나도 의문이 있더라도 그냥 대학과 사회의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대학 생활 중 고민했던 것이 내 혼자만의 고민에서 그쳤다는 것에 아쉽게 생각한다. 또 문제에 대해 고민만 했을 뿐,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많은 사람이 한 번은 해봤을 고민일 거로 생각한다. 그리고 대학이 변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을 거로 생각한다. 결국 변화시켜야 한다.


변화를 기대하고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변화를 주기 어렵다. 기대하는 이들이 변화의 주체가 되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모든 변화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대학이 변하기를 바란다면 바라는 우리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현재 대학과 사회의 문제가 무엇이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방안이 필요한 것인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혼자만의 고민에 그치지 말고, 함께 모여 자유롭게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대학은 토론의 장이 될 수 있는 최적화된 장소이며 대학생은 자유로이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대학 생활에 대한 감상이 너무 늦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쳇바퀴처럼 도는 사회가 걱정된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될까 봐 더 심해질까 봐 걱정된다. 양질의 교육 환경이 제공되더라도 결국 사회가 학생에게 요구하는 것이 같고 학생도 어쩔 수 없이 힘겹게 따르지는 않는지 아쉬움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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