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를 보고
※ 작중 내용들이 언급되므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술에 취한 나는 이렇게 적는다. 삶은 낙관보단 비관의 성질을 더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인간은 선천적으로 고독한 존재라고. 그러나 사랑은 우리를 비관과 고독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아름다운 감정이기에, 그것은 우리에 앞서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인간의 손에서 발명되고 마는 것이라고.
'윤희에게'는 정말 그런 영화다. 사랑을 발명하고 또 재발명한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나선형으로 모여 하나의 소실점으로 다가간다. 그 소실점의 끝을 들여다보면, 겨울에 눈이 소복이 쌓인 홋카이도의 오타루가 보이는 느낌이다. 그 느낌에 귀를 기울이면 작중 '윤희'와 '쥰'의 편지가 들리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여백과 순백으로 가득 찬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이 하얀 아름다움에 대한 몇 가지 감상을 남겨두고자 한다.
그들의 사랑엔 여백이 있었다.
미루고 미루다가도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아니, '해야 하는'이 아닌 '해내야 하는'이 맞을 수도 있겠다. 정말 우리에게는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 있다. 문제는 그런 일이 대부분 사회의 고정 관념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정 나이가 되면 어떤 것을 해내야 한다든가, 특정 성별은 어떻게 행동해야만 한다든가, 우리는 정말 많은 고정 관념들 속에서 자라났다. 가령, 우리는 정말 '수능 잘 보기'를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하겠지만, 현실을 봐라. 정말 많은 학생들이 오늘도 수능을 위해 궂은 땀을 흘리고 있다.
해내야 하는 일들은 우리를 힘들게 만든다. 솔직해져보자.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사는 세상은 모두가 한 번씩은 꿈꿔본 세상이지 않았는가. 해내야 하는 일 없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세상은 우리에게 있어 영영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다. 하지만 해내야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오히려 하지 못하던 일들이 있던 시대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기에 감사하라, 혹은 '해야만 하는' 일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등의 도덕적 조언은 건넬 수가 없다. 해야만 하는 일들로 인해 오늘도 죽음을 결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여기 감히 함부로 판단을 내려 놓을 수 없다. 다만, '해내야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닐 수 있다'라는 열린 판단을 기억해두자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참 그런 식으로 열려 있다. '해내야 하는' 일들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훈계적인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해내야 하는' 일들은 그저 지나간 과거로 나타날 뿐이다. 윤희와 쥰은 헤어져야만 했다. 이것은 그들이 성별과 사회적 관념에 따라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윤희와 쥰의 이별에 관련하여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 아닌데 우리 사회가 왜곡된 시선으로 그들을 개도하려 들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일이다.' 등의 메시지는 작품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윤희에게'는 그저 그 사실들을 과거의 이야기처럼 관객들에게 덤덤히 들려주고, 이 일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관객의 몫에 온전히 맡긴다. 도덕적 판단이 요구될 법한 상황에서의 해석을 여백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청춘과 황혼 사이
하지만 영화가 여백을 채워가는 모양새는 꽤 사랑스럽다.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가 있잖아"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쥰이 참을 수 없는 마음으로 쓰던 사랑의 편지다.
핵심 조연들을 먼저 언급하고 싶다. 윤희에게는 딸 '새봄'이 있고, 쥰에게는 고모 '마사코'가 있다. 이 둘은 모두 개성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로서 영화가 줄거리를 제시하며 여백을 채워가는 데 감초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새봄'은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본인은 아름다운 것만 찍겠다며 항상 풍경 사진만 찍는다. 그러던 새봄이 처음으로 찍는 인물 사진은 본인의 엄마 '윤희'다. 새봄이 주는 가족애의 메시지는 작품 전반에서 나타난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집안이 갈라서게 된 순간을 돌아보며 아빠가 아닌 엄마를 택한 이유로 "엄마가 더 외로워 보였거든"이라고 말하는 새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애틋하다. 줄곧 철이 없는 모습으로 묘사되던 새봄에 대한 여백이 채워지는 순간이다.
마사코의 존재는 영화에 깊이를 더한다. 고모 '마사코'에게 젊은 날의 사랑을 묻는 '쥰'의 질문에, 마사코는 추억을 되짚어 이야기하다 다음과 같은 말로 대화를 마친다. "나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평생을 기억한 셈이지" 이 대사를 통해, 본 영화는 갓 스무 살이 되는 청춘들의 사랑과 추억들로 가득 채워진 황혼의 사랑, 그 모두를 담으며 차차 여백을 채우게 된다.
양자의 중간인 중년 세대의 사랑은 앞서 제시된 '청춘'과 '황혼'의 만남으로 인해 발생된다. 엄마와 친구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며 무모하게 홋카이도 여행을 추진한 '새봄'과, 쥰이 윤희를 그리워하며 쓰던 편지를 쥰의 동의 없이 한국의 윤희에게 부친 '마사코'에 의해, '윤희'와 '쥰'의 짧은 재회가 이뤄지는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중 시점은 모든 것이 느려진 시점이다. 윤희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새봄은 대입을 앞두고 시간이 한가하다. 이런 그들이 함께 방문하게 되는 장소는 겨울의 홋카이도다. "눈이 언제쯤 그치려나"라는 대사가 반복적으로 제시될 만큼 겨울의 홋카이도는 끊임없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면 세상은 고요해진다. 사람들은 조심히 걸어 다녀야 하고, 도로는 저속 운행을 하는 차로 가득 차게 되고, 실외에 있을 수 없으니 모두들 실내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눈에는 흡음 작용이 있다. 눈 덮인 세상은 천천히 고요해진다.
인생에 쉼표가 찍힌 시점에서, 윤희와 새봄이 홋카이도를 방문하는 장면은 그렇게 느림 안에서 연관성을 갖는다. 느린 시간을 갖고 살던 모녀가 느린 공간에 방문한다. 사랑을 하는 모녀가 사랑을 위해 눈의 고장에 방문한다. 여백의 쉼표가 순백의 쉼표를 만나는 순간이다.
눈에는 발자국이 남는다.
무너질지 알면서 쌓는 모래성처럼 인생은 쌓고 무너지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쌓아도 쌓아도 흔적 없이 무너지는 날들이 있다. 그건 눈도 마찬가지다. 눈에 발자국을 남기고 남겨도, 모두 언젠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는 "곧 없어질 발자국이라도, 나의 발자국을 따라오는 사람이 안전히 길을 따라올 수 있다면 괜찮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여기서 '따라오는 사람'은 두 종류로 이해될 수 있다. 엄마를 이해하고 살아갈 결심을 하는 딸 '새봄', 그리고 과거의 자신을 따라 본인의 현재를 가늠하는 '윤희' 자신. 이제는 정말 자주 엄마의 사진을 찍는 새봄과, 그런 새봄을 보며 웃는 윤희가 여기 있다. 두 존재 사이에 무슨 극적인 감정적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두 존재의 삶에 공통된 쉼표를 찍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쉼표의 시간 속에서 둘은 더욱 애틋한 존재가 됐다.
'윤희'는 어떻게 됐는가. 그녀는 서울에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물론 앞서 적었듯, 그녀가 어떻게 용기를 얻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 것이고, 또 어떤 사랑을 하게 되었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흐릿하게만 남아 있다. 과거, 그녀와 쥰의 사랑이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묘사 역시 추가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저 동성애라는 낙인으로 사회로부터 매장 당했을 것이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이러한 실연에도 불구하고, 남성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했던 윤희의 삶의 무게 역시 명백히 그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모든 해명은 관객의 상상으로 자유롭게 채워지기에 더욱 무겁게 와닿게 된다.
시간은 여백이고, 공간은 순백이었다. 영화는 쥰을 향한 윤희의 편지로 끝이 난다. 윤희는 이제 정말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윤희의 환경은 물질적으로 결코 좋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새롭게 일자리를 구해야 할 것이며, 동성애를 향한 사회의 편견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마침내 윤희가 사랑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말할 생각이 없다. 윤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선 이 사회의 정말 더 많은 것들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인생은 무수한 추신의 연속이다.
윤희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도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이 없으니까.' 부끄럽지 않은 그들의 사랑을 부끄럽게 만든 우리의 편견만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사랑은 정말 누구에게나 재발명되는 것이고, 모두의 사랑은 있는 그대로 소중하며 다양한 것이다. 작품 속 윤희와 쥰의 사랑도, 새봄과 경수의 사랑도, 마사코의 추억이 담긴 사랑도, 쥰을 향한 료코의 사랑과, 윤희를 향한 용호의 사랑도 모두 아름답다.
쉼표가 있기에 음표가 아름답고, 햇빛이 있기에 눈이 아름답고, 고독이 있기에 사랑이 아름답고, 불행이 있기에 행복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랑과 행복의 연관성에 대해 이 글 안에선 더 이상 미결의 상태로 남겨두는 것이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영화 '윤희에게'가 많은 것들을 쉼표로 놔뒀기에 더욱 서정적이었고 의미 깊었던 것처럼. 우리의 삶에 아직 채워지지 않은 꿈이 있다면, 그 아름다운 꿈은 순백과 여백의 쉼표로부터 비로소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인생이라는 편지엔 얼마나 더 많은 추신이 필요한 것일까. 여기, 영화의 마지막 구절을 남기며 글을 줄인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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