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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진 Jul 14. 2022

비눗방울은 터지기 마련이니까


모든 상처는 기대로부터 온다. 나는 줄곧 이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나약한 인간들의 기대가 만나 빚어낸 상처. 인간들은 너무 생각이 많아 탈이었으니까. 사랑, 죽음, 도덕 등의 개념은 어쩌면 인간들이 자신들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들을 너무 많이 정의하려 들었기 때문에 생겨난 잡념들일지도 모른다.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아닌 거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많은 노고를 들여 깊은 생각을 뱉어 내느냐 말이다.









우리는 그날 밤 술에 취해 온 동네에 비눗방울을 날리고 다녔다. 동네 한복판엔 6개의 횡단보도가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감싸고 있는 큰 사거리가 있다. 우리는 신호가 바뀌면 사거리의 한 가운데 서서 밤하늘 위로 열심히 비눗방울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입으로 불어 방울 하나하나 빚어내는 그런 아기자기한 낭만은 아니었고, 방아쇠를 당기면 자동으로 비눗방울이 나오는 그런 일종의 장난감 총을 활용해 밤을 보내고 있었다. 사거리의 가운데서 비눗방울을 쏘고 있으면, 주변에 신호에 걸려 정차된 차들이 우리를 모두 관람하고 있는 느낌이었고, 우리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퍼진 형태의 차들은 때때로 유명인의 모습을 구경 온 인파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 허상의 인파를 즐겼다.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많은 비눗방울을 밤하늘을 겨냥해 날렸다.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비틀즈의 애비로드 컨셉도 있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무언가를 분명히 말해두려고 한다. 슬픈 날의 밤은 뭔가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곤 한다는 점을 기억해달라고 말이다. 내가 맨날 대중들에게 관심이나 받으려고 하고, 매일 밤 허공에 비눗방울 총이나 쏘는 정신 나간 위인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 주면 좋겠다. 그날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었다. 살다 보면 때론 그런 날이 있다고 느낀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상대방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특정 행동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있다고. 다만 저 날은 그것이 우리가 사는 동네 곳곳을 우리의 장난감 총으로 겨냥해 흔적을 남기는 일이었을 뿐이라고.



우리가 밤새 걸어 다닌 모든 발자취가 곧 우리의 표적지였다. 밤은 겨냥하고 또 겨냥해도 여전히 밤이었고, 해는 여전히 떠오를 생각이 없었다. 지독히 어두운 순간, 그때쯤 그런 생각을 했던 듯싶다. 왜 어떤 비눗방울은 금방 터지고, 또 어떤 비눗방울은 터지지 않고 하늘 끝까지 올려가려 드는 것일까? 유독 단단한 비눗방울들에 신경 쓰이던 밤. 이 밤을 이해하기 위해선 내 친구 K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곁들어야 하겠다.










학교 후배와 만나 미술관을 구경하고 귀가하던 날. K는 내게 연락해 긴히 털어놓을 이야기가 있다며 술을 마시자고 했다. 이런 말을 자주 꺼내는 친구가 아니라 유독 더 걱정이 되었다. 괜찮은 술집에서 꼬치 세트와 하이볼을 시켜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너는 마치 유치원생을 연상케 하는 샛노란 색의 상의를 입고 양손에 총 두 자루를 쥐고 술집으로 들어왔다. 네가 들어와 나를 찾으러 안쪽까지 걸어오는 동안 매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너를 한 번씩 보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완전히 샛노란 옷을 입고 총 두 자루를 들고 여유롭게 술집으로 들어오는 꼴이란. 그런 이상한 차림새의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만인의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당혹스러운 순간이 있어도 현장에서는 내색을 안 하려 드는 버릇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행동뿐만이 아니라 대화에서도 나타나곤 하는데, 상대방이 어떤 취지에서 말을 하듯 우선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편이다. 다 이유가 있겠지,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언젠가 설명해 주겠지, 라는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 하면 이해가 되려나. 샛노랑이 총 두 자루를 쥐고 술집을 비집고 들어올 때, 나는 굳이 별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자리에 앉고 하이볼을 한 입 마실 때쯤 괜한 말을 꺼내 분위기를 환기했을 뿐이다.



“이 집 꼬치가 맛있더라고. 기대도 안한 채소류가 맛있어. 아마 베이컨이랑 같이 볶고 토치로 그을려 불향을 입힌 거 같은데, 애호박에서 채즙이 나오는 게 되게 마음에 들더라고.”



K는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게 잘 먹고 있었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는지 하이볼을 두 입째 마시니 낯빛도 곧 붉어지곤 하였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면 진실을 거짓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건 늘 진심인데, 진심을 곧장 말하면 상처로 바뀌곤 해 그것에 거짓의 껍데기를 씌워 말하곤 하는 것이다. 주제를 겉도는 대화가 오래 지속되는 건 그 껍데기의 현상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헤어진 연인에 대해 말하거나, 혹은 지금 새롭게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인데, 이런 사랑 이야기는 때론 낯간지러운 것이라 괜히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다, 새롭게 들어간 소모임엔 어떤 사람들이 있다 등으로 대화를 돌려 시작하곤 하는 일.



그런 겉돎의 대화가 지속되고 슬슬 사람의 눈에 생기가 사라지고 피로가 올라올 때가 적기다. 그때 즈음 사람은 본심을 드러낼 마음의 준비를 머금게 된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그래서 고민이라는 게 뭔데? 헤어지기라도 했어?”



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럼 그렇군. 그럼 다음 질문을 던질 차례다.



“왜?”



너는 하이볼을 한 모금 더 마신다. 벌써 세 입째. 얼굴은 조금 더 붉어졌고 이제 목도 불그스레하다.

머뭇거리는 상대가 말을 꺼내려고 할 땐 침묵을 지켜줘야 한다. 사람의 말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10초 정도 센다.



“내 잘못이지.”



식탁 한구석엔 시치미가 있다.

이게 일본에서 자주 먹는 매콤한 가루인데 꼬치에 뿌려 먹으면 맛있다는 사실을 네게 알려주며, 나는 속으로 10초 더 기다린다.




“내가 쓰레기가 맞는 것 같아.”



"전에 말해준 그 사람과 헤어진 거지?"



"응"



"이름이 H였나? 많이 울면서 헤어졌어?"



괜한 질문을 했나 싶어 바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세상의 모든 이별은 의미가 있는 거니까"




나는 이 말을 덧붙이며 잠시 회상에 빠졌다. 오래전 어느 날, 이 친구의 연인 H에 대해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눈을 감고 있었다. 어째서 세상엔 비운히도 상처 입은 사람이 왜 그리도 많은지.











H는 참 지독히도 비운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의 투신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투신하는 자들은 땅에 닿아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기 전에 심장마비로 정신을 잃는다고. 그래서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에 의지하여 긴긴밤을 버텼다고 했다.



동생의 마지막에 고통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동생은 늘 고통스러워했고 자신의 고통이 어떻게 해야 줄어들지 늘 고민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는 예상치도 못했다고 했다.



동생은 어릴 적부터 늘 연약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땐 성격이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 친구가 없었다고 했다. 그나마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 오면서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했다. 친구들을 사귀고, 가고 싶었던 대학에 갈 때쯤 되자 이유 없는 확신이 생겼다고 했다. 앞으로 동생이 연약해질지언정 나약해질 일은 없겠구나.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생은 너무나도 나약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했다. 겉은 멀쩡했지만 속은 나약하고 또 나약해져서 결국 죽어 버린 것이라고 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말짱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죽음과 꽤나 밀접할 수도 있다. 어느 순간 나를 찾아온 죽음이라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그 죽음을 받아들여 수용하고자 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은 자신이 힘들다는 신호를 주변에 보낸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배가 등대를 발견해 무사 귀가하는 꿈을 꾸듯, 그렇게 자신의 신호를 사방에 내보내며 자신만의 등대를 기다리는 기대를 갖는 것이다. 그 신호를 내보내는 것도 용기고,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것도 용기다.



그만큼의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정상적으로 보이게 위장할 용기 또한 있는 사람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용기를 모두 삶의 위장술에 투입하다가, 더 이상 아무 기력도 남아버리지 않으면 최후의 용기를 내서 삶을 투신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 편이었다.












H는 K가 든든해 보여 좋았다고 했다. K는 하고 싶은 일은 다해야 직성에 풀리는 사람이었으니까. 노란 옷 입고 술을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사람이었고, 아무리 스케줄이 바빠도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무대에 서는 날이면 스케줄을 어떻게 해서라도 조정해서 그 무대를 구경 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K의 그런 실천 능력을 종종 부러워했다.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늘 내 미래를 대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았지만, 내가 보는 K는 걱정을 오래 담아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걱정이 있으면 걱정과 공존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실천력으로 걱정을 단칼에 해치워버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용기가, 결단력이, 자신감이 늘 부러웠다.



아마 H는 구원을 바랐을 것이다. H는 동생의 투신 이후로 자신의 삶도 잃어버린 느낌이었을 것이니까. 동생의 죽음이 자신의 삶과 자꾸만 함께 했으니까. 떼어 내고 싶어도 떼어낼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였으니까. K를 만난다면, 자신도 K와 같은 성격을 갖게 되지 않을까, 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을 수도 있다. 혹은 죽음은 죽음이고, 삶은 삶인 거라는 무심한 이분법을 K로부터 배울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구원을 요하는 사랑은 재앙이 된다. 모든 인간은 인간이고,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사랑으로 인해 구원에 다다르겠다는 욕심은 실현될 수 없다. 내가 연약한 만큼 세상 사람들도 모두 일부분 연약하고, 내가 나약한 만큼 내 연인의 한 부분도 나약한 것인데, 왜 우리는 자꾸만 사랑으로 하여금 구원을 빚어내길 기대하게 되는 걸까. 인간이 사랑에 대해 부여하는 너무 많은 의미가 내겐 너무 무거웠다.




아무튼 H는 K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의 비운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 누구한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라면서,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할 때도 말하지 않은 이야기라면서, 동생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곤 자신을 제발 이 구렁텅이에서 꺼내달라며 절규했다. 아니 사실, 속은 절규였지만 겉은 웃음이었다. H는 힘든 이야기를 웃는 표정으로 모두 털어놓았다. 사람이 힘든 일을 웃으면서 말할 땐, 그 이상의 울음이 이미 지나간 것이다. 충분히 울은 자만이 눈물 섞인 이야기를 웃으면서 말할 수 있다. H는 웃을 용기는 있었지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용기는 없었다.



초여름 밤, H는 K의 손을 잡고 말했다. 자기를 버리면 안 된다고. 자기는 이제 갈 곳이 없는 사람이라고.



그날 새벽, H는 울었고, K는 밤잠을 설쳤다.












"방에는 유서가 있었어."



친애하는 K에게,

너는 동생이 죽고 난 뒤 방 정리를 하는 나의 마음을 상상해 본 적 있니?



연필로 쓴 최후의 편지는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글씨가 망가지고 꼬부라져 있었어. 고통에 몸서리치는 사람이 뭔가에 억눌린 듯 몸을 배배 꼬며 쓰러지는 모양과 비슷해 보였어. 나는 그게 무서웠어.



글씨를 보고 있으면 나도 동생을 따라 하루빨리 죽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어. 동생이 어디선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어. 유서가 아닌 초대장 같아 보였던 거지. 눈을 감으면 빛이 보였어. 빛의 끝엔 동생이 있을 것만 같아 손을 허우적대면, 아 꿈이었구나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어.



이불 끝자락을 잡고 울던 날이 참 많다? 이불 끝자락엔 무심히도 동생의 온기와 체취가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동생의 잔재들이 내 숨을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내 숨은 거칠어졌어. 울지 않을 수 없었어. 나는 죽음이 무서운 사람이라 너무나도 살고 싶었는데, 내가 살아 숨 쉬는 게 죄인 것만 같았어. 나도 죽었어야만 하는 걸까?



동생이 떠나고 난 뒤 유품을 정리하며 걔가 남기고 간 마지막 책들을 훑어봤는데, 행복과 관련된 모든 글귀에 광적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더라. 동생은 행복하고 싶던 게 아닐까? 걔는 자살이 아니라 행복을 택한 거지. 나는 그렇게 믿어 버리기로 했어. 이게 사실이 아니어도 좋아. 나는 이제 걔를 잊어야 하고, 내가 내린 판단에 반박해 줄 당사자는 이제 세상에 없잖아. 나는 동생이 행복을 택했다고 믿는 게 마음이 편한걸. 나는 그렇게 믿을 거야. 걔는 행복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난 거라고.




"그런데 K야"



"K야"



"내 말 듣고 있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눈을 뜨면 K는 내 앞에 있다. K는 내게 이 상황에서 무슨 위로를 해줬어야 하냐고 묻는다.



나도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형태의 위로를 해줘야 할지 모르는 순간들이 때때로 있다. 너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을 거야, 와 같은 상투적 말이 최선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내 친구의 존재가 그의 연인에게 큰 힘이 되었을 거고, 친구 연인의 존재가 투신한 자살에겐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이 죽거나 떠나는 순간은 '너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을 거야'라는 상투적인 말로 장식하기에는 뭔가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더 나은 표현이 분명 있었을 것인데 그 순간의 나는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침묵도 때론 위로가 되는 거니까. 괜찮았을 거야."



이 말이 진짜 최선이었을까. H에게 필요한 건 침묵이 아니라 사랑이지 않았을까? 침묵과 사랑이 정반대의 개념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 잘 될 거야 사랑해"와 같은 말이라도 하는 게 좋았을 거라고 알려줘야 하지 않았을까? 정말 알 수가 없다. 어째서 사랑은 때로 죽음과 연결되는지, 인간은 왜 이리도 나약해 자신의 삶을 사랑에 기대어 살고 싶어 하는지.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있잖아. H는 동생의 죽음 이후로 정신과에 가서 약을 받았대. 그게 너무 신경 쓰이는 거야. 연인에 기대 지탱되는 삶이 나을지, 약에 기대 지탱되는 삶이 나을지 가끔씩 고민해 봤다? 물론 나는 이런 생각 깊게 잘 못하는 편이라 금방 포기하긴 했거든"




K는 지금 울고 있다. 혀는 서서히 꼬이고 발음이 하나둘씩 망가지고 있다. 그래도 K는 자신의 말을 관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수가 있더라도 해야 할 말은 오늘 다 하고 가겠다는 의지가 있다.




"그래도 약에 기대는 삶보단, 사랑에게 기대는 삶이 낫지 않을까? 약은, 약은 뭔가 부정적이잖아. 사랑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텐데, 약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요, 하면 사람들이 H를 가엾게 볼 거 아니야. 나는 그게 너무 미안했어. 내가 H를 가엾게 만든 건 아닐까? H에게 나는 뭐였을까?"





아, 나도 취했던가.

그 뒤에 무슨 말을 더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르겠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울고 있었을 수도 있겠다.












흐릿한 기억만이 남아 있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연거푸 몇 잔의 술을 더 마셨다. 나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고, K는 자신의 정신을 죽일 진정제가 필요했으니 서로에게 이득인 셈이었다.



밤은 깊어지고 술집의 사람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었다. 사장님은 주방에 들어가 설거지를 하고 계셨고, 아르바이트생은 포스기 앞에 서서 오늘 매출을 정산하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하는 설거지 소리와, 옆 옆자리 테이블 아저씨 두 분이 요즘 젊은 여자애들이 어쩌고저쩌고하는 대화만이 이제 귓가에 맴돈다. K는 술에 취했는지 구석에 머리를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결제할게요. 이 카드로 해주세요."



"많이 드셨네요. 괜찮으세요?"



"아 네, 집이 바로 저 앞이라 괜찮아요."



"그나저나 친구분은 괜찮으신 거죠? 샛노란 옷에 저 정체 모를 총도 두 자루씩 쥐고 와서 술을 취할 때까지 마셔대니 관심을 안 가지려야 안 가질 수가 없어서요."



"어... 네 괜찮겠죠? 아마 괜찮을 거예요."





나는 K와 함께 술집을 빠져나온다. K는 찬 바람을 쐬자 정신이 돌아오는지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러곤 총 한 자루를 내게 쥐여준다. 한번 쏴보라고 했다. 나는 하늘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긴다. 비눗방울이 쏟아져 나온다. 비눗방울은 소리 없는 폭죽같이 밤하늘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며 비상한다. 투명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거 궁금했지? 비눗방울 총이야. H가 준 생일 선물."



"......"



"저기 저 사거리에서 사진 좀 찍어줘라. 그래도 선물이니까 기념으로 남겨 놔야지"





나는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는다. 그것이 헤어진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인 것 같아서. K는 지금 웃고 있다. 동심은 때때로 어른들도 해맑게 만드는 법이라, 몇 년 만에 날려 보는 비눗방울만으로도 웃음이 지어질 만큼 충분히 재밌는 것이다. 나도 총을 빌려 빈 하늘을 가득 채운다. 하늘엔 이제 비눗방울밖에 보이지 않는다.



"H는 나한테 먼저 헤어지자 했으면서 왜 생일선물은 챙겨준 걸까?

그리고 또, 왜 생일선물로 비눗방울 총 두 자루를 보낸 걸까?"



"글쎄, 그게 그 사람의 최선이라서?




나는 그 말을 하곤 울상이 됐지만, K는 그 말을 듣곤 해맑게 웃었다.












정말 모든 상처는 기대로부터 왔다. 나는 비눗방울을 날리며 웃던 K도, 그런 K에게 비눗방울 총을 준 H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불행을 준 동생의 자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K와 H에게 이 모든 비극을 선사한 게 동생의 자살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어떤 사랑은 시작부터 비극이기도 하니까. 아무리 웃으면서 시작한 사랑이라도 속은 타들어 갈 때도 있는 법이니까. 뜨거워 견딜 수가 없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마음도 사랑의 일부이곤 하였으니까.



그들은 원래 헤어질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맥락에서 최선을 다해 '운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해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들의 헤어짐이 선택이라든가, 결심이라든가, 협의라든가, 계약이라든가, 이런 유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심혈을 기울여 '운명'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있음에 집중해달라. 그들은 이미 헤어졌고, 내 입장에선 그들의 헤어짐이 '운명'같은 것이라고 함부로 짐작해버리는 게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이미 갈라선 사랑이, 다시 말해 이미 죽은 사랑이 살아 있는 나에게 무슨 말을 걸 수 있겠는가. 그저 속 편하게 함부로 짐작해버릴 용기가 내게는 있다. 나는 그리하여 그들을 헤어질 운명이라 믿어 버리기로 했다.



이 시점에서 내게 확실한 건 이별 선물이자 생일 선물인 비눗방울 총 두 자루에 대한 의미에 대한 것이다. 헤어진 연인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 마지막 마음인 그 총은 무슨 형태의 사랑이었을까. 만약 진지한 선물을 주면 너무 많은 의미를 내포한 물건처럼 보여 K가 힘들게 끊어낸 자신과의 사랑에 다시금 마음의 여지를 주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결말을 짓는 건 너무나도 미안해하는 마음이 담겨 있지는 않았을까. 혹은 불필요한 선물을 주면 K가 자신을 아주 영영 잊어버릴 것 같은데 그건 또 싫어서, 고민 끝에 내린 그 중간 어딘가의 선물은 아니었을까. 아주 가끔은 서랍장에서 총을 꺼내 하늘을 향해 겨냥해 보라고. 하늘 어딘가엔 자신의 동생도 있고, 자신이 아주 영영 놓아버린 사랑도 있을 테니 가끔씩은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비눗방울을 날려 달라고.



아, 모든 형태의 사랑은 시간이 지나면 아름다워질까? 나는 아직도 동네 사거리의 한복판, 즉 6개의 횡단보도가 겹쳐 있는 그 지점을 지날 때 비눗방울 생각을 한다. 그곳에서 눈을 감으면 나는 언제나 밤하늘에 잠겨 있는 듯하고, 밤하늘을 온통 수놓는 비눗방울이 수채화처럼 내 마음을 일렁이며 가득 채우는 느낌까지 든다. 사랑에 빠진 인간은 얼마치의 병에 걸린 것일까? 나는, 우리는, 그리고 내 사랑은 H와 K를 닮아 나약함을 감당하지 못해 터져 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결말에 슬퍼하지 않는다. 터져야 할 것은 제때 터져야 빛을 내며 추억이 되는 거니까. 그리고 모든 비눗방울은 언젠가 터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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