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는 결핍이 아니라, 의미의 가능성이자 세계와의 살아 있는 접촉면이다.
검은 점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자연스럽게 흰 배경을 함께 떠올릴 수 밖에 없다.
메를로-퐁티는 이 무의 문제를 좀 더 구체적인 지각의 영역에서 탐구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지각할 때, 그것을 ‘전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본다. 의자의 한 면을 볼 때, 다른 면은 보이지 않지만, 그 보이지 않는 면 역시 지각에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 ‘보이지 않음’이 지각의 본질적인 일부이며, 의미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 드러나지 않으며, 그 여백 속에서 의미가 생성된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주인공이 각성을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너무 많다. 이 클리셰는 하이데어의 철학과 맞닿아있다. 그는『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즉 현존재가 자신의 유한성과 죽음을 인식할 때 비로소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고 봤다. 이때 마주하게 되는 ‘죽음’은 결핍이 아니다. 무는 삶을 각성시키는 계기이며, 존재를 드러나게 해주는 배경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비로소 삶의 본질이 분명해지듯, 무는 존재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러한 사유는 서양 철학자들의 독창적 결과물은 아니다. 이는 훨씬 더 오래전 동양 철학, 특히 도가(道家) 사상에서 깊이 탐구되어 왔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항아리는 그 안의 빈 공간 때문에 쓰임이 있다”고 했고, 장자는 세상의 고정된 가치와 언어를 넘어 ‘허(虛)’의 상태, 즉 열려 있는 무위(無爲)를 논했다.
무의 실용
무의 철학은 실용철학이다. 피곤한 몸을 위해 좋은 영양제를 더하는 것보다, 몸에 안 좋은 음식들을 줄이는 것이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습관도 마찬가지. 좋은 습관을 쌓으려 애쓰기 전에, 나쁜 습관 하나를 없애는 것이 더 중요한 전환을 만든다. 비움은 채움보다 더 직접적이다. 무의 관점에서 역설하자면 절제는 곧 해방이며, 억제는 곧 정돈이다.
무의 철학은 관계에서도 확장 가능하다. 흔히 말하는 서양의 황금률은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긍정형)는 능동적, 채움의 윤리다. 하지만 오히려 동양의 황금률, 기소불욕 물시어인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부정형)는 소극적 비움의 윤리가 서양의 황금률보다 더 견고한 윤리를 제공한다.
무를 실천한다는 것은 삶의 소음을 걷어내는 것부터 시작된다. 채움보다 비움, 긍정보다 절제, 소유보다 여백.
물론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