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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by 이주낙

우리는 무언가를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주식을 살지 말지, 집을 사야 할지 말지, 누구를 지지할지, 어떤 뉴스를 믿을지...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에는 항상 평가가 따른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그 판단이 무엇을 근거로 이루어지는가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 사실 위에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오판에 빠진다.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흔히 말한다. 사실 판단은 '그렇다' 또는 '그렇지 않다'로 검증 가능한 진술이고, 가치 판단은 '좋다'거나 '옳다'는 식의 평가다. 일상과 사회 속에서 이 둘은 자주 혼동되고, 그 혼동은 감정적 논쟁과 비합리적 결정을 낳는다.


예를 들어 보자. 특정 주식이나 부동산의 자산 가치가 과거에 상승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오를 것이고, 그러니 지금 사야 한다는 말은 평가고 기대다. 많은 재테크 콘텐츠는 과거의 수치를 보여주며 현재의 매수를 독려한다. 사실과 판단의 경계를 흐리는 것이다. 상승률이라는 데이터의 사실성과, 투자 권유라는 가치 판단은 엄연히 다른데, 이 차이는 종종 무시된다.


어떤 지역의 소득 수준에 따라 면학 분위기나 비행 청소년의 비율이 달라지는 건 통계적으로 입증 가능한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를 근거로 그 지역은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가치 판단의 영역에 들어선다. 문제는 판단이 먼저 굳어지면, 그 판단에 맞지 않는 사실은 불편한 잡음처럼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신념을 따라 투자하고, 시장은 그 신념을 조용히 배신하며 돌아간다.


하지만 여기서 반대의 질문을 하나 더 해보자. 과연 우리는 그렇게 사실 다음, 판단의 순서로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인간은 판단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판단을 통해 정보를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생존해왔다. 판단은 어찌보면 빅데이터이고, 오류가 아니라 진화적 전략일 수 있다. 우리가 어두운 골목에서 낯선 사람을 보고 먼저 경계심을 갖는 것도, 판단이 앞서는 사고방식 덕분이다. 그 판단은 때론 우리를 구하고, 때론 우리를 속인다.


더불어 사실이라는 것도 그 자체로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 통계 수치, 뉴스 보도, 데이터 자체도 어떤 기준으로 수집되고 어떤 방식으로 편집되는가에 따라 가치가 스며들기 마련이다. 팩트라고 불리는 것조차 어떤 시선과 전제의 산물일 수 있다.(요즘 팩트팩트하는 사람들의 말은 경계하게 된다.)따라서 사실과 판단은 그 자체로 분리하기 어렵다. 이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건 완벽한 분리가 어려움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조율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건 사실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해석인가? 이건 객관적 정보인가, 아니면 내 감정과 기대가 만든 믿음인가?


질문은 판단 이후에 하면 늦다. 먼저 판단하고 나중에 사실을 끼워 맞추는 순간, 우리는 정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게 된다. 판단은 필요하지만, 사실 위에 놓일 때만 방향이 된다. 판단이 고정되면 사실은 왜곡된다. 반대로, 사실을 오래 바라볼 수 있다면, 판단은 가볍고 유연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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