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소 May 14. 2019

슬프지만 살아 있는 기분으로

영화 <미스 스티븐스>를 보고

인간은 비슷한 면도 있지만, 저마다 서로 다른 존재다.

게다가 저마다 각자의 신체 안에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이

구조적인 고독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런 고독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을 동경하게 만든다.

_나탈리 크납,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감정의 자유’


  생명체는 어느 것 예외없이 한정된 시간에 예속되어 ‘나’를 담고 있는 몸과 더불어 생과 사를 완결해야 하는 필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갇힌 자’들일 뿐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최대한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물리적 한계에 매몰되어 있기 보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사는 내내 분투한다. ‘자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자유’라고 누리고 있는 것은 정말로 자유가 맞을까?



경고등warning


  “누구랑 얘기는 하니?”  

  “......얘기할 사람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스티븐스 선생님의 물음과 빌리의 대답이다. 빌리는 이른바 ‘행동장애’를 가지고 있어 학교의 관심 대상이고 딱히 속 얘기를 나눌 친구도 없다. 주말에 있을 연극 대회에 가려면 학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 교장은 인솔교사 레이첼 스티븐스에게 윌리엄 미트먼에 대한 주의를 한참이나 준다. 문제가 있을 시 학교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기로 하고 빌리, 마고, 샘을 태운 스티븐스의 오래된 자동차는 연극 대회를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난다. 딱히 그렇다 할 교차점이 없는 네 사람의 어색한 동행이 시작된 것. 


  학교에서 매일 얼굴 보고 별 얘기를 다 하는 사람들인데도 정작 서로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는 게 참 이상하다며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던 마고의 말은 "얘기할 사람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던 빌리의 말과 함께 앞으로 길지 않은 시간 이 영화가 펼쳐보일 이야기에 대한 안내이기도 하다. 자, 그런데 어쩌나.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행은 자동차에 경고등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스티븐스는 낡은 차라 원래 그렇다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알면서도 애써 묵살하는 것에 가까워 보이지만) 낡은 차의 경고등이 고장으로 제멋대로 켜진 게 아니라 정말로 위험하다는 신호였는지 이내 타이어는 터져버리고,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차는 고속도로 한 가운데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 미스 스티븐스는 그런 사람이다. 낡은 자동차를 타고, 올드 팝만 나오는 채널을 선호하며, 타이어든 자신의 내면이든 누군가와의 관계든 일찌감치 경고등이 켜져 있음에도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위험이 아닐거라 애써 무시하다가 그것이 ‘펑’하고 소리가 나고 주저앉게 되어서야 비로소 긴급 처리를 하며 상황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는, 그런 사람. 차가 퍼져버릴 때 당황하여 “sh*t!"과 ”fu*k!"를 연신 뱉어내던 스티븐스는 지금은 선생님 모드가 아니니까 이해해달라 하지만 사실 뭘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모르겠고 가르치는 것 외엔 표현에도 서툰 사람이라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뱉어낼 수단으로 욕밖에 없다.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 방치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과 사물의 공기에 민감한 ‘행동장애’(이 아이가 정말로 그러한 사람인가에 대한 '진단'에는 동의하기 힘들지만. 또한 영화 내적 논의와는 별개로 그러한 용어 자체가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 건 아닌가 하는 평소의 찜찜함에 대한 의문이기는 하지만.) 빌리는 미스 스티븐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바로 알아차리게 되는데 바로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눈치챈 것. 긴급 출동 서비스로 스페어 타이어를 갈아끼운 이 낡은 차는 이미 늦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아빠들이 듣는 음악’ 전문 채널에서는 마침 America의 Sister Golden Hair가 나오고 노래를 함께 소리 높여 부르는 차 안은 서로에게 전하는 메시지 같은 가사가 리듬을 타고 흐른다.


  “나를 조금만 이해해 줄래요? 나를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나를 조금만 사랑해 줄래요? 사랑이 느껴질 만큼만. 괜찮은 척 했지만 이젠 말할래요. 참기 힘들어요.”will you meet me in the middle? will you meet me in the air? will you love me just a little. just enough to show you care? well, I tried to fake it. I don't mind saying. I just can't make it.



스몰토크small talk

  시끌벅적했을 호텔 프런트에 도착한 스티븐스 일행이 뒤늦게 체크인을 하고, 그날 저녁엔 참가자들과 인솔교사들을 위한 가벼운 파티가 열린다. ‘월 플라워’가 되어 플로어를 보고 있는 빌리의 눈엔 술잔을 들고 혼자 춤을 추는 스티븐스가 보인다. 그런 스티븐스에게 훤칠한 어느 선생님이 자연스레 접근한다. “무슨 과목을 가르치세요?”, “영어 과목을 가르치...영어를 담당...영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당신, 스몰토크에 약하시군요.”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성인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웃으며 말하지만 핑계라고 하기엔 왠지 허술하다. 아내도 있다는 이 유부남 교사의 방에서 옷을 여미며 나온 스티븐스는 열쇠를 안에 두고 문이 잠겨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빌리와 복도에서 마주친다. 빌리가 기다린 건 또다른 열쇠를 들고 있는 룸메이트 샘이었을까, 어떤 남자와 함께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던 샘(선생님)이었을까.



  친구는 별로 없지만


  다음 날 아침, 연극 대회 참가할 아이들이 리허설을 하는 사이 타이어를 교체하러 카센터에 다녀오려고 나선 스티븐스는 자기보다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빌리와 마주한다. 리허설이 오후에 있다는 핑계를 대고 스티븐스 선생님을 따라나서기 위해 일찌감치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비소에서 차를 봐주기까지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야 하는 빌리와 스티븐스는 근처 햄버거 맛집으로 걸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로 서로의 거리를 조금 좁힌다.

  “저는 친구가 별로 없어요.”

  “나도.”

  아마 이때 속엣말로 한 마디씩 얹었던 관객이 많지 않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다시 리허설 장으로 돌아 온 두 사람에게 샘이 심각한 얼굴로 다가와 빌리가 리허설에 빠져 실격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전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앞으로 가던 빌리에게서 우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카메라가 멀리서 잡고 있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는 없지만 주최측에게 자신이 리허설에 참석하지 못했던 사유를 설명하는 모양인데, 이 때 앞사람과 유연하게 대화하는 빌리의 표정과 부드러운 제스처는 익히 알고 있는, 타인과 불화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빌리는 단지 얘기 나누고 싶은 상대가 없었을 뿐 마음을 열고 싶거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엔 저렇게나 능란하게 의사 전달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벌점을 먹을 수도 있다는 우려를 이렇게 간단히 불식시키고 샘과 빌리는 예선을 무사히 통과한다.


  긴장한 탓에 하얗게 대사를 잊어버려 울면서 뛰쳐나간 마고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네시 윌리엄스)의 블랑시 두보아를 연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마고의 대사와는 관련이 없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블랑시가 자신과 이루어질 뻔 했던 미치와 나누는 대화의 일부는 <미스 스티븐스>가 전하는 메시지와도 어느 정도 닿아 있어 보인다.


     블랑시   슬픔이 진실을 가져오나 봐요.

     미치     슬픔은 분명 사람에게서 진실을 끄집어내요.

     블랑시   얼마 안 되는 진실이나마 슬픔을 경험한 사람만이 갖고 있죠.     


  빌리와 스티븐스 같은; 친구도 많이 없고, 말을 나눌 사람도 그닥 없어 일상적 대화에 서툰 이들이 어쩌면 이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해도 되고 안해도 될 말들을 쉴 새없이 쏟아내는 이들 틈에서 그저 묵묵히 제 내면과 마주하다가 꼭 해야 하는 말을, 꼭 해야 하는 타이밍에 정확히 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 ‘스몰토크’에는 약하지만 실수로 대사를 다 마치지 못해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마고 옆 칸에서 이런 말을 건네는 스티븐스처럼.

  “오늘은 힘들거고,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괜찮아지는 날이 찾아와.”


  빌리가 가지고 있는 잠재성은 스티븐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른바 ‘슬픔의 전문가’랄까. 다음의 ‘침대 퐁퐁 씬’을 보자.



  “Don't Be Sad!"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느 것이 더 난해한가

_허은실, 「목 없는 나날 」 부분


  스티븐스 방문을 누군가 다급하게 두드린다. 혼자 홀짝이던 작은 술병들과 어질러진 주변을 대충 치우고 문을 열어보니 빌리가 서 있다. 짜란- 하고 빌리가 내보이는 건 과자 한 봉지. 선생님이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걸 눈여겨보고 있다가 얘기할 핑계삼아 챙겨 온 것. 어제 당신 가슴이 어리게 생겼다며 꼬득이던 유부남 선생이 오늘은 혼자서 술 한 잔 마시고 ‘영화’나 보고 잤으면 한다며 귀찮은 내색을 하여, 그로부터 받은 상처까지 누르고 있던 터라 누구라도 귀찮고 아무도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마당에 얘는 또 뭔가. 스티븐스는 성급히 돌려보내려 하지만 갑자기 복도를 흥분 상태로(연기를 하며) 누비던 빌리가 순식간에 방으로 들어온다.

  

   “Don't Be Sad! Don't Be Sad!"

  난 슬프지 않다고 당장에 내려오라고 소리를 치지만 침대 위에서 퐁퐁 뛰는 빌리는 그럴 생각이 없다. “슬퍼하지 마세요! 슬퍼하지 마세요!” 발로 퐁퐁 뛰고 두 손을 흔들며 슬퍼하지 말라고 연신 신호를 보내는 빌리 앞에서 레이첼은, 무장해제가 되고 만다. 화가 나서 올라간 침대는 고작 한 발짝 정도의 높이였지만 딱딱하고 나를 튕겨내기만 하던 땅바닥과는 사뭇 달랐다. 가만 있기만 하여도 옆에서 뛰는 사람의 온기 가득한 물결이 가슴까지 치고 올라와 자기도 모르게 슬슬 뛰게 만든다. 함께 깔깔 웃으며 아픔을 풀어헤치는 두 사람이 이 밤, 세상의 모든 슬픔을 다 위로할 것만 같다. 그렇게 슬픔과 위안의 세헤라자드가 될 것만 같았던 빌리와 레이첼은 어머니에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다 울게 된 선생님이 갑자기 빌리를 밀어내면서 순식간에 벽이 되어버리고 만다. 학생에게 기대어 울고 있는 제 모습에 현실이 불을 켠 것. 마침 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고, 샘과 마고가 차례로 들어와 새로 알게 된 친구에 대해 이런저런 불만을 털어 놓는 정신 없는 상황에서도 더 정신 없었을 스티븐스는 이런 말을 건넨다.


  “사람들은 대부분 재수 없어. 원래 그래. 알면서도 겪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 가끔 좋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재수 없어.” 스티븐스가 이렇게 말하는 사이 이미 제 감정에 상처를 입은 빌리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린다.



  우리의 진짜 모습을 똑바로 보세요


  빌리가 무대에 섰다.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의 비프가 되어 아버지 윌리에게 맞서는 장면이다.

  “아버지는 진실을 알아야만 해요. 아버지는 누군지. 나는 누군지! 아버지는 우리가 어떤 인간인지 몰라! 이제 아셔야 해! 이 집에서는 단 십 분도 진실을 이야기해 본 적이 없어요! 난 이제 여기서 벗어나겠어. 자, 아버지, 이게 저예요. 아버지가 저를 너무 띄워 놓으신 탓에 저는 남에게 명령받는 자리에서는 일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누구 잘못이겠어요! (......) 왜 원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왜 여기 사무실에서 무시당하고 애걸해 가며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저 밖으로 나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건데! 전 왜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거죠, 아버지? 전 1달러짜리 싸구려 인생이고 아버지도 그래요! 저는 시간당 1달러짜리예요! 일곱 개의 주를 돌아다녔지만 더 이상 올려 받지 못했어요. 한 시간에 1달러!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저는 더 이상 집에 상패를 들고 들어오지 못하고 아버지도 그런 건 기대하지 말아야 해요!”  


  관객을 압도하는 빌리의 연기. 그리고, 저 대사에 겹치는 수많은 감정들에 더 붙일 말이 있을까? 직장에서든 삶을 살아내는 개개의 사정에서든 '자유‘를 담보로 우리는 대개 속박된 일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묵과하고 넘어가거나 이런 삶의 형태가 내가 원했던 것이라고 합리화했지만 실은 내면 깊숙이에선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를 저 외침들; “왜 원하지도 않은 존재가 되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거야? 내가 원하는 건 저 밖으로 나가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그때를 기다리는 건데!”

  당신은 지금 당신이 원하는 진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나는 그냥 나예요. 그게 다예요.“


  무대에서 잘했다고 칭찬하러 온 스티븐스 선생님의 손을 이끌고 창고 같은 공간으로 간 빌리는 레이첼을 마주보고 왜 어제 나를 갑자기 가라 했냐고 따진다. 나는 선생님의 슬픔을 알아차렸는데, 나는 슬퍼하는 선생님을 웃게 해줄 수 있는데 왜 자꾸 나더러 가라고 등을 떠밀었냐고.

  이어서 쏟아지는 빌리의 말은, 빛의 난반사를 보는 듯하다. 눈부시다.


  “일주일 전까지는 약을 꾸준히 먹었어요. 슬프지 않으려고 먹는 약인데 먹으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요. 그게 내 선택지예요. 슬프거나 멍하거나. 그래서 그만 먹었는데, 진짜 내가 완전 미쳐버릴까봐 무서웠는데, 근데 아녜요. 기분 끝내줘요! 진짜 살아 있는 기분이고 그냥 막......”

  몸 안에 있는 모든 감정이 빛에 반응하며 일제히 일어서는 듯 빌리의 감정이 확장되는 놀라운 순간이다. 그런데 맙소사, 이 아이가 약을 먹지 않아 이상 행동을 보인다고 생각한 스티븐스는 이내 정색을 하고 만다. 내 고민도 감당이 안되는데 내 앞의 이 아이는 대체 왜 이러나. 자신의 편이 되어줄거라 생각하고 약을 중단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진짜 속내를 말하다 급속히 냉각된 빌리는 당연한 수순으로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이제야 ‘얘기’하고 싶은 상대를 찾은 듯 했는데 이런 식으로 차단 당하다니. 방금까지 찬란하던 빌리의 내면에 순식간에 일제히 불이 꺼져버리고 만다. 그 차단기를 내려버린-사실은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몰랐던 스티븐스에게 당신은 다를 줄 아냐고 쏘아붙이고 빌리는 자리를 떠버린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할 지 몰라 덜덜 떨리는 스티븐스의 손은 교장의 번호를 누르고 있다. 빌리의 이상 행동을 ‘보고’하기 위해서.



감정의 전문가, 빌리


  빌리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다. 글쎄, 정상/비정상을 무슨 기준으로 분류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반의 범주라 여겨지는 패턴에 속하지 않으면 그것을 모두 ‘비정상’으로 보는 건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빌리는 ‘행동 장애’를 가진 아이가 아니다. 그는 남들보다 세상에 반응하는 민감성이 남다르고 누구보다 다채로운 감정의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 1부터 100까지의 음계에 모두 반응하는, 이른바 감정의 전문가이다. 약을 먹으면 감정이 날뛰지 않는 대신에 멍하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평균에 가까워지니까. 그렇게 약 하나면 간단하게 일반으로 편입하게 되고, 더 많은 친구와 얘기 상대가 생길지는 모른다. 그러나 매끈하게 다듬어 놓은 멍한 내면으로는 도저히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어른들 모르게 자발적으로 약을 섭취하지 않았을 때 비로소 길들여지지 않은 자기가 하나씩 둘씩 생기를 얻게 되고 각기 다른 명도와 채도를 지닌 감정들이 제 안에서 춤추며 당연히 슬픔에도 빛이 감돈다. 빌리는 슬픔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블랑시 말처럼.


  이상한 말이겠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속에 놓여있는 외국에서 되려 자유를 느낄 때가 있다. 제대로 알아듣고 구사해야 답답하지 않을텐데 모름에서 오는 자유의 쾌감이 더 크다. 외국에서 내 나라 말을 쓰는 사람의 낌새를 채면 일부러 더 입을 다물게 되는 것도 ‘아는 말’의 매끈함에서 기인한 지긋지긋함 때문이다. 내 나라 말을 쓰고, 내 나라 말을 듣는데 그것이 되려 외계어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내가 한 말은 과연 타인에게 얼마나 온전하게 가 닿을까? 옆 사람이 내게 한 말은 공기와 닿는 순간 얼마나 덜 훼손된 상태로 내게 와 닿는 걸까? 오해와 이해는 글자 모양만큼이나 그 폭이 좁은데 우리는 그렇게나 ‘대화’라는 걸 하고 산다. 말이 아프고, 말이 귀찮고, 말이 말을 이해하고, 오해하고, 오해를 이해하고, 이해를 오해하고, 말이 징글징글하고, 말이 말위로 바벨탑을 쌓는 동안 관계는 위태롭게 지탱되고,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데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겠고, 말 같은 소리 하고 있고, 내 말을 내가 못 믿겠고, 말하고도 후회하고, 말 안하고도 후회하고, 말 좀 해봐, 무슨 말, 말은 개뿔, 어쩌고저쩌고 말 말 말 말. 그래서 빌리, 뭐라고?


  “얘기할 사람이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 기대세요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_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연극 대회에서 2등을 거머쥔 빌리 덕분에 이제 학교의 예술 교육 과정에 긍정적 신호가 켜지게 되었다. 이 성과는 빌리에게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해준 미스 스티븐스와 참가비를 몰래 후원하고(마고의 부모님) 『위대한 개츠비』 시험지를 제공해 준 마고와 시험을 칠 수 있게 랩탑까지 협찬해 준 샘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타인과 불화를 일삼는 빌리에게 트로피보다 더 큰 힘을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지긋지긋한 타인이다. 사람이 있고, 또 그 옆에 사람이 있다. 오해와 불신의 원천이며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게 사람이지만 그것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도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물론 빌리 자신의 용기도 큰 힘을 발휘했다. 빌리는 우리와 똑같이 아직도 삶이 뭔지를 배우고 있는 미스 스티븐스에게 그 용기를 나누어 주었다. 슬퍼하지 말라고 거듭 말했지만 그 말은 외려 슬픔을 긍정하는 말처럼 보인다. 인간은 본래 외롭기 마련이고 그 가장 밑바닥에는 슬픔이 있다. 우리는 어딘가에 갇힌 존재이고 모두 각자의 방에서 제 외로움을 돌보며 산다. 영화 초반 스티븐스의 수업 시간에 언급되었던 ‘감정의 자유’를 상기해보면 함께 차를 타고 출발했던 이 네 사람은 여기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을 안고 돌아왔을 것이다.

  빌리가 치르는 『위대한 개츠비』의 시험문제 중 하나가 “저 멀리 보이는 녹색 불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개츠비에게는 그것이 데이지로 상징되는 자기 존재의 근거였겠으나 그 ‘녹색 불빛’이 비단 개츠비에게만 있을까. 각자가 지향하는 ‘녹색 불빛’이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곳에 있고 우리는 일정부분의 자유를 기꺼이 저당 잡힌 채 그 속에서 삶의 이유와 본질을 캐물어가며 살고 있다.


  부모님이 기다리는 곳에 빌리를 내려주면서 스티븐스는 약을 끊는 문제에 대해 부모님과 진중하게 상의해보라고, 그 분들께 기대라고 한다. 그게 부모님이 계시는 이유라고. 빌리 또한 선생님도 누군가에게 기대야한다고 말한다. 엔딩에 다시 나오는 Sister Golden Hair를 생각해보자. ‘나를 조금만 이해해 줄래요? 나를 조금만 기다려 줄래요? 나를 조금만 사랑해 줄래요? 사랑이 느껴질 만큼만. 괜찮은 척 했지만 이젠 말할래요. 참기 힘들어요.’ 옆에 사람이 있다면 그를 재촉하지 말자. 그를 조금만 더 기다려 주자. 그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만큼 옆에 있어보도록 하자. 괜찮은 척 하고 있는 그가 입을 열어 내게 참기 힘들다고 말할 때까지. 그렇게 해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 그런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내면을 내어주지 말고 표면만으로 대하라고 충고 씩이나 하는 ‘영화광’ 남자 교사에게 미스 스티븐스가 했던 말처럼. “어떻게 바깥에 머무를 수 있어요? 이 친구들이, 바로 앞에 있는데.”



* 영상 캡쳐 자료: <미스 스티븐스>, 배급사: 티캐스트   #미스스티븐스 #MissStevens

이전 13화 호퍼로부터의 비하인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