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혹은 그림자』 (로런스 블록 엮음, 문학동네)
현상(現象)을 읽는 각자의 관점은 어디서부터 출발하는 걸까. 현상 이면의 이야기가 발화되는 지점이라든지 실체 없는 희미한 이미지들이 또렷하게 제 목소리를 가지고 청자의 귀를 열어 젖히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비평의 영역이 치열하게 대상을 해석하고 언어를 확보하고 틀을 만드는 사이 이야기는 현상을 앞지르고 확산하고 명랑하게 번식한다. 이 때의 ‘명랑’은 이야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 정서와는 별개로 그것이 뻗어나가는 상태, 라고 하면 될까.
여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7점이 있다. 그리고 17명의 작가가 그림이 현상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선 물을 한 잔 마시고 앉았다. 어쩐지 목이 마르다. 삭막함, 무표정, 차가움. 호퍼의 그림이 야기하는 이런 감상은 말끔하게 씻어낸 민낯으로 거울을 보는 기분과 연결된다. 목차를 찾아 본 후 322쪽을 펼쳤다. 17편의 단편 중 먼저 읽어 본 건 호퍼의 그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였다. 호퍼를 좋아하는, 이 책을 펼쳐 본 다른 이들은 어떤 그림-이야기를 먼저 찾아봤을지 재미있는 궁금증이 내내 인다. ‘호퍼의 그림에서 탄생한 빛과 어둠의 이야기’라는 부제가 이 책의 모든 것을 요약한다. 저명한 작가들이 각자가 맡은 그림을 앞에 두고 그 그림이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그림 같다. 작가가 달랐으면 발화되는 이야기도 판이했을 터. 한 편이 더 있다. 그림만 있고 이야기가 침묵 중인 <케이프코드의 아침>. 그 그림을 맡았던 작가가 give-up 하여 독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책표지의 그림이다. 지금부터는 우리가 이야기 할 차례다.
2017. 9. 25
* 써두었던 글을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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