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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소 Sep 29. 2021

평범하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
배우 키키 키린

『키키 키린의 말』 (고레에다 히로카즈, 마음산책, 2021)을 읽고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고들 하지만 그 말은 오래 전부터 내겐 질문의 형식으로만 부딪쳐 왔다. 자신을 잘 안다는 게 뭔가.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잘 안다는 말을 저렇게 쉽게들 하는 걸까. 나도 나를 속속들이 잘 모르겠고, 그래서 그걸 아직도 알아가는 중이고, 아직도 내 안에는 나와 불화하는 내가 많아 그 ‘나’ 들이 뭘 원하는 지도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다들 아는 걸 나만 몰라서 내가 겨우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 싶을 땐 옅은 우울감이 발끝까지 내려온다. 찰랑거리는 표면의 나와 저 깊숙한 곳 더듬어 지지도 않는 곳에 위치한 나와 나와 나··· 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으로 서로에게 송수신하고 있는 건지조차 알 수가 없다.   

  

  내 안의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고 빛을 주는 사람이 있다. 그제서야 비로소 거기 있었구나 알게 되는 나의 자질과 면모에 이름 붙여주는 사람. 혹은 나는 나대로 그렇게 살아왔지만 시대의 흐름이나 어떤 시기의 기운 같은 것이 한 사람의 존재감을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분명한 역할을 하는 사람.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은 실로 드물고 귀한 일이다. 내가 열심히 하고 노력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알아봐주는 사람의 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인연이 어디 흔할까. 고레에다 히로카즈감독은 2007년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만든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계기로 배우 키키 키린을 만나게 된다. 1943년 생生인 키린이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 만나 임종까지의 십여 년 기간 무척이나 큰 비중을 차지했던 사람.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키키 키린을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루한 말이지만 영혼의 짝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준비되어 있는 말 아닐까 싶을 정도로.      


  키키 키린은 TV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람이다. 공중으로 휘발되는 속성 때문에 TV 드라마와 예능, 광고 등에 출연하는 ‘연예인’으로서의 위치를 즐겼던 배우의 진가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알아 본다. 그리고 주어진 배역 안에서 키린이 얼마나 놀랍도록 그 역할이 되는지를 확인한다. 키린은 자신의 역할을 부감하는 사람이다. 감독의 연출대로만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 사람이 된다. 이건 연기 잘하는 배우를 칭찬할 때 흔히 호출되는 ‘메소드method 연기’의 느낌하고는 또 다르다. 키린의 연기는 메소드의 결이 아니다. 그런 것 따위 훌쩍 뛰어넘는다. 먹으면서 대사하는 걸 보면 연기라기 보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어쩜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실제로도 그렇게 해내는 배우는 많지 않다고 한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대사를 하는데 집중하느라 동시에 다른 걸 한다는 게 쉽지 않고 더군다나 먹는 건 입을 써야되는 일이기도 해서 대사와 함께 입 안에서 뒤섞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걸 키린보다 잘 하는 배우가 뚜렷하게 잘 생각나지 않는다.     


  고레에다 감독은 권위적 위치에 있지 않았고 배우 스텝들과 수평적 관계에서 작업하며 특히 키린은 배우로서도 연장자로서도 감독에게 특유의 솔직함으로 직언과 의견을 아끼지 않았다. 감독은 함께 호흡하며 그런 의견들에 귀를 열고 수용하고자 했으며 많은 경우 키린의 연기를 보고 영감을 얻기도 한다. 서로에게 시너지가 되는 사이. 이런 인연을 만나는 것이 어디 그리 흔한 일일까.     


  키린은 고레에다 감독이 자주 자신을 기용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왜 그렇게 나를 찾는지 진심으로 궁금해 한다. 특히 <태풍이 지나가고>의 어머니 역으로 의뢰를 했을 땐 그 역할을 할 다른 배우도 많을 거라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역시나 감독의 안목은 그런 ‘평범’한 역에 키키 키린이 아니면 안된다고 굽히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자주 있어요. 캐스팅할 때 “이 역할은 평범한 느낌의 사람이 좋겠어요“라고들 하지. 하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그저 ‘평범할’ 뿐이야. ‘평범한 사람의 매력’이 있어야만 하는데도. (···) 분명 그 사람은 평소 모습 그대로지만, 영화 속에서 그 역할이 매력적으로 나오느냐 마느냐는 별개예요. 그런 데서 대부분 캐스팅이 실패하지. ‘평범한 역할’을 매력 있게 연기하는 건 귀찮은 작업이거든.”(키키 키린, 155)     

  키린도 잘 알고 있다. ‘평범한’ 연기는 그냥 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상의 연기를 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고 배우의 진가는 그런 데서 드러난다. 그리고 특별한 사건의 부각 없이 일상을 연출하는 감독의 자질 또한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도 감독도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있다.      


  이 책의 말미에 실린 우치다 야야코의 기고문 중 고레에다 감독의 시선에 대한 이런 문장이 있다. 

  “그저 바라본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 어른은 대개 어떤 선입관이 머릿속을 스쳐서 대상이 지닌 순수한 면을 조금이라도 왜곡해 받아들이기 일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은 모르는 것을 보면 되도록 재빨리 자기 안에서 판단을 내려 안심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그런데 그의 눈은 언제까지나 단정 짓지 않고 고요히, 그저 관찰하기를 선택한다.”(340)   

  키키 키린의 눈에 대해선 영화평론가 백은하의 말을 인용한다. “현재를 보는 눈과 과거 혹은 미래를 동시에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배우는 신비롭고도 무섭다.”(341)

  하여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눈과 키키 키린의 눈이 ’마주친‘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라고. 그러면서 ‘두 사람은 친한 친구도, 부모 자식도, 사제지간도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기도 하다’고 둘의 관계를 말한다. 사는 내내 나는 이런 사람 한 명쯤은 만날 수 있을까, 언젠가는 오래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내내 했다.      


  암이 뼈까지 전이되어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던 키린은 고레에다 감독에게 “이제 할머니는 잊고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젊은 사람을 위해 써. 난 더 이상 안 만날 테니까.”라고 한다. 좋은 배우 이전에 좋은 어른이었던 사람, 키키 키린이 그립다. 



2021.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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