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책]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아, 이러다가 친구가 모조리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이제 싫어하는 사람 이름을 대라고 하면 모두들 나를 가리키며 “아아, 그 사람.” 하고 비웃을 것 같다. 문방구 영감처럼 되는 것이다.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바닥 없는 더러운 늪으로 뛰어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좌불안석이었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노노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있잖아, 나 착한 할머니가 되어야 할지 못된 할머니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나 점점 못된 할머니가 되는 것 같아.” “그럼 전엔 착한 할머니였단 거야?” “……더더욱 못된 할머니가 되어간다고. 속도위반으로 달리는 폭주족처럼 말이야.” "뭘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야. 난 말이야, 어릴 적부터 노노코처럼 제멋대로인 애는 없단 소릴 부모님한테도 선생님한테도 들었다고.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p.89-90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사실 나는 언제부턴가 싫어하는 사람을 참아내는 시간이 짧아졌다. 아니 거의 없어졌다. 예전에는 집에서나 학교에서만 그랬다. 최소한 친구들한테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제는 친구들에게도 정말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조목조목 설명한 다음, 두 번 다시 이런 행동이나 말을 할 거면 앞으로 연락을 안 하는 게 낫겠다고 내 입장을 말해준다.
그런 말을 하지 않거나, 더 이상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거나. 어쨌든 정리가 된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연락을 하는 친구는 정말 앞뒤 봐주지 않고 관계를 정리한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호되게 정리한 인간관계는 20대 후반에 알게 된 친구였는데 몇 년 후 그 친구 결혼식 며칠 전에 내가 그녀의 결혼 축하를 거절하며 정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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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사이를 정리하면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시간을 돌린다고 해도, 나는 관계를 끊는 선택을 할 테니 굳이 시간을 안 돌려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나 세 번째 관계 끊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마음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았다. 많이 안 친했었던 이유도 있고 삶이 팍팍해서 신경 쓸 게 줄어든다고 생각이 들어서인지 두, 세 번째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학교 다닐 때 친구에게도 그런 적이 결국 있었다. 정확히는 친구라고 하기는 애매한, 같은 반 아이였다. 뭔가 성향이 달라 가까워진 적이 없는 아이였다. 야무진 아이여서 그늘 같은 건 없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자신은 아빠가 없으며, 엄마의 지금 남편은 엄마의 3번째 남편일 뿐, 자신의 아빠가 아니라고 쿨내 나게 스스로 말하는 그 아이가 가끔 하는 부탁들은 뭔가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그 아이 스스로는 당당한데 나 혼자 그 아이가 안쓰러웠달까.
그녀를 <어린 왕자>의 장미 같은 성격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아이는 순한 아이였던 나를 호구 같은 개념으로, 친구라고 부른 것이었다. 나에게 친한 척을 할 때면 이것저것 사달라고 하는 경우가 100%였는데 그 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게 나도 모르게 안쓰러워 웬만하면 사주곤 했다. 자주 부탁하는 것도 아니었고 엄청 비싼 걸 사달라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같이 놀았던 적이 없었다. 우린 친구가 아니라 내가 그냥 바보였고 호구였다.
그 아이는 알면 알수록 <어린 왕자>의 장미 같은 캐릭터가 아닌 그냥 나쁜 년이었고 나는 더 이상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호구 짓을 그만둔 걸 알게 된 그녀는 가끔 나를 마주칠 때마다 비아냥거리듯 말을 걸었다.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경제적인 호구는 그렇다 치고, 정서적인 호구로서의 나까지 놓아주기 싫었는지 마주칠 때마다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나는, 아버지가 없는 그 아이가 안쓰럽기도 하면서도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차피 졸업하면 안 볼 거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참지 못하고 졸업식 며칠 전에 그녀에게 절대 잊을 수 없는 쌍욕을 하고 상처를 주었다. 나는 주었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녀가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사실은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졸업할까 봐 몇 달간 내가 그 아이에게 해야 할 말과 클라이맥스인 그 욕을 연습까지 했었으면서도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가 알고 보면 착한 아이였기를 바랐다. 내가 알지 못한 그녀의 착한 모습을 의도치 않게 발견하고 욕을 연습하던 것을 반성하며, 내가 밤마다 연습한 그 욕을 할 일이 없길 바랐는데 역시 세상이란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그렇게 돌아가는 법은 없다. 내가 속으로 덜덜 떨며, 내가 절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내가 하고자 했던 욕을 또박또박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했다. 연습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내가 다가가서 귀 좀 빌려달라고 하자, 무슨 귓속말을 하려는지 몰라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있던 하얗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나에게서 몸을 떼던 그 표정이 생각난다. 나 같은 호구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겠지.
어쨌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쌍욕을 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욕을 한 내 모습이 나에게도 혼란스러웠다. 나 자신을 약간 혐오했던 것도 같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있던 어느 날, 이런 평화로움이 동급생에게 욕이나 하는 나에게 너무 과분한 행복 같아버려서 몇 주전에 내가 한 행동과 내 마음을 할머니에게 고백했다.
난 나쁜 아이라고, 어른들이 알면 절대 하지 말라고 했을 욕을 친구에게 했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나쁜 아이인 것 같지가 않다고, 후회되지도 않는다고. 그래서 더 나쁜 아이 같다고.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이 흘렀지만 반성의 눈물이 아니었다. 이전의 착한 나보다 이런 나쁜 성격의 내가 더 만족스러워서, 앞으로 예전의 착한 아이로 되돌아갈 일은 없을 거 같아서, 그래서 내가 조금씩 더 나쁜 인간이 되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일 것 같아서였다.
할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걔가 그럴 만한 짓을 했겠지, 너한테.
-...... 그럴 만한 짓이긴 했는데...... 이제 각자 대학 가면 평생 안 볼 수도 있으니까 참아도 됐는데... 안 참았어.
-잘했어. 평생 볼 사이 아닌데 뭐하러 참아. 할 말 하고 살아야지. 잘했어.
나한테 그럴 만한 짓을 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할머니의 말 덕분에 더욱 힘을 얻어 좀 더 빨리 자기혐오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아마도 그때 이후로 싫은 일이 있으면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게 기분 나쁘다고, 싫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말을 하려고 한 것 같다. 네가 한 말의 어떤 부분 때문에 화가 났지만 참았다는 것, 지금만 참을 것이고 앞으로는 참지 않을 거라고 정확하게, 아주 정확하게 말해준다.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혹은 그런 말을 하면 그냥 너와 인연을 끊겠다는 입장도 그 자리에서 말한다. 경우에 따라 순화해서 말하기는 한다. 이런 말 계속할 거면 기분 나빠서 앞으로 너랑 연락 못 한다, 정도로.
참고 참았다가 결국 욕까지 하면서 인간관계를 끊고 싶지 않다. 그냥 욕은 하지 않으면서 인간관계만 끊고 싶다.
쓰다 보니 내가 화가 많은 사람 같지만 나는 대체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산다. 에너지 소모하는 걸 싫어해서 남들이 보기에 따질 일도, 조금 내가 손해인 일도 웬만해서 그냥 넘어간다.
단, 선만 넘지 않는다면. 하지만 여기나 저기나 별 것도 아닌 일로 꼭 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학생 시절, 친구들과 바닷가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내가 어묵 소시지를 먹으려 하자 부잣집 여자가 말했다. “아, 싫다. 징그러워.”
내 뒤를 걷던 그 여자가 “요코는 치마가 후줄근하네”라며 웃은 적도 있다. 다른 친구 집에 고기만두를 선물로 가지고 갔더니 친구가 “요코가 뭘 가지고 올 때도 있네.”라고 했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 여자는 “요코는 구두쇠니까.”라고 대꾸했다.
예순여덟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평생토록 그 여자를 용서할 수 없다. 저주를 퍼부어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그 여자가 암에 걸렸다. 당황하던 와중에 나도 암에 걸렸다. 자승자박이었다.
p.202-203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참지 않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요코 할머니는 저주를 퍼붓는 스타일이었다. 내 스타일과 좀 다르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터넷 익명 게시판의 이러이러한 친구가 있는데 화를 내도 될까요?라는 류의 글을 접할 때마다 신기하다. 나 같으면 이미 화를 내고 나왔을 상황이고 아니면 요코 할머니처럼 저주를 퍼붓고 말 일이지 그 상황을 지나치고 나서 타인들에게 나의 ‘분노 정당성’을 물어보고 화를 내려는 사람들이 있다니.
물론 싸움이라는 것은 그 이후의 친분관계 단절과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하는 등 그에 따르는 대가가 있지만, 내가 화를 내면, 어차피 대가도 내가 치러야 하는 것 아닌가.
익명의 사람들이 화를 내세요, 하고 많이 응원을 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내가 치를 대가를 대신 치러주는 법은 절대 없다. 그냥 내가 화가 나면 내 선택에 따라서 화를 내거나 말거나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손해 보는 게 없는데 왜 그 사람들 의견을 듣고 나서 화를 내야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화를 낼 때 낼 수 있어서,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줄이고 나서 나는 점점 더 내 생활의 질이 올라가는 걸 느낀다.
나는 요코 할머니가 멋있지만, 시간이 흘러도 저주는 퍼붓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욕은 하지 않고) 인간관계를 끊는 내 방식대로의 못된 할머니로 살고 싶다.
그래도 암에 걸릴 수는 있겠지만 착하게 살다가 암에 걸리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싫어하는 것들은 멀리할 만큼 멀리 하고 암에 걸리는 게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