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야 어디로 갈지 결정을 한다
어떤 사람의 죽음은 다른 사람 인생에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내가 서울에 올라오게 된 것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때문이었다. 계속 꿈을 접은 채로 직장을 다니다가 남들처럼 돈 모아서 평범하게 결혼을 할 것인가. 글을 쓰느라 돈도 모으지 못하고 최고은처럼 쓰다 골방에서 죽더라도 도전해볼 것인가.
나는 남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특별하게 잘 살고 싶지는 않지만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착실하게 돈 모아서 시집가는 거, 그거 말고 죽더라도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고 싶었다. 30대에 죽더라도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죽는 게 죽을 때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80세, 90세까지 내가 원하지도 않는 삶의 방식으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는 거 말고.
그렇게 내 인생의 나침반은 그 작가였다. 나도 그분 비슷하게 쓰다가 골방에서 죽으면, 최고은-김시은 라임 살려서 기사 되면 기억하기도 쉽겠다 싶었는데 쓰다가 죽지도 않고, 계속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도 않아서 그녀와 내가 연관되어 사람들 머릿속에 남을 일은 없을 것 같다. 나는 글 쓰는 것보다 돈 쓰는 게 가끔은 좀 더 좋은 것 같고,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좀 더 나은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여기로 이끈 내 나침반은 그녀의 삶,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었다. 비록 다른 방향으로 길을 틀었을지라도.
지금은 작가로 밥벌이하는 친구 중에 한 3년 넘게 생계가 불안했던 친구가 있었다. 끝내 작가로 밥벌이를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가 당시 영화 <독전>을 보고 왔다며 말했다.
-나, 작가로 살기로 한 거 잘한 것 같아. 김주혁 되게 좋아했거든. 사람이 그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뜰 수 있구나 생각하니까 하고 싶은 거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 들더라. 사람들이 한심해하건 말건 돈을 벌든 못 벌든 말이야. 나, 죽을 때 후회 안 할 것 같아.
그녀와 내가 가진 나침반은 다르지만, 우리는 각자의 나침반을 갖고 있다. 그 나침반을 통해 마지막에 도착하게 될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가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나침반을 보며 우리는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게 ‘세상이 가리키는 나침반’과는 다른 방향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사실 세상이 우리에게 쥐어주려는 ‘그 나침반’은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방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알고 보면 각자의 인생에 별 도움도 안 되는 나침반 아닐까. 우리가 도착한 곳이 설령 원래 가려던 곳이 아니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누군가의 말처럼 잘못 탄 기차가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
출처 <세바시 1233회>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