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은 Oct 12. 2020

우리는 언제 이야기를 하게 될까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때


가끔, 내가 쓴 글을 다시 읽어볼 때가 있다. ‘그때 그 글 잘 썼었지, 다시 읽고 싶다.’ 이런 거라기보다는 댓글 알림이 뜨면 무슨 글이지? 해서 보게 된다. 누군가가 시간을 들여 댓글을 쓰면서까지 공감을 해주고 싶었던 글이 어떤 글인지 궁금하다.


그런 글들을 읽다 보면 어떤 반복되는 흐름이 보인다. 사실은 하나의 에피소드인데 여러 번 글로 썼거나, 아니면 한 사람의 특정한 성격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쓴 것도 있었다.


처음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두 번째로 글을 쓸 때 새로운 이야기가 아닌데 왜 쓰고 싶을까 싶었다. 이미 썼다는 걸 모르지도 않으니 각도를 매우 다르게 쓰고, 첫 번째에 들어간 내용과 디테일을 최대한 빼서 읽는 사람이 같은 일이라고 여길 수 없게 하기는 하지만, 쓰는 나는 알고 있는 것이다. 전혀 겹치지 않는 이야기 1,2,3이 사실은 하나의 연결된 사건이라는 것,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겹치기도 한다는 것도.


예를 들자면, 어떤 친구와 가까워지게 된 계기가 있던 날, 밥 먹으면서 그녀와 나눈 대화, 그 이후 1차/2차 술자리 추억이 나에게는 하나의 이야기 덩어리로 존재하지만,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이야기 1, 그 날의 식사 대화는 이야기 2, 1차 술자리 추억은 이야기 3, 2차 술자리 추억은 이야기 4로 조각조각 나눠서 쓰는 것이다.


물론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서 또 쓴 게 가장 큰 이유지만, 더 현실적인 이유는 하나의 일이라고 해도 우선 양이 많기 때문이다.


가끔 어떤 사람과의 대화는, 단 둘만의 이야기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많은 양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때가 있다. 어렸을 적 트라우마, 최근의 고민, 부모님과의 갈등, 남자 친구 얘기, 먹고 살 걱정, 집 걱정. A4 용지 십 수장을 훌쩍 채울 만큼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수많은, 디테일한 에피소드를 곁들여가며.


그런 이야기들은 몹시 인상적이어도 하나의 이야기에 그 모든 디테일을 다 넣을 수가 없다. 대화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다고 해도, 순서대로 다 쓰고 보면 반드시 산만해져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할 때 딱히 개연성 있게 하지 않고, 의식의 흐름대로 이것저것 하고 싶은 대로 그냥 다 말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이야기를 글이랍시고 다 쓰면, 나부터도 그 정도로 많은 양의 ‘남의 일’을 시시콜콜 읽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핵심과 무관한 주변 이야기들이나, 재미있어도 맥락상 없어져야 할 내용을 다 털고 쓴 글을 읽어보면 못다 한 이야기가 많다. 다 못 쓴 이야기가 많으니 아쉬울 수밖에. 아직 설명하고 싶지만 능력이 안 돼서 다 설명하지 못했던 부분도 남아 있고. 그래서 동일 이야기를 다르게, 또 쓰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언제 하는가. 도대체 왜 하는가.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라는 책의 북 토크에서 장영은 작가님이 이 질문을 참여자 모두에게 던지고 대답을 물었다.


나는 ‘한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차라리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잊고 넘어갈 텐데,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당했던 데이트 폭력/ 가스 라이팅 같은 일. 물리적인 폭력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분이 안 풀려서, 친구들하고 술만 마시면 하고 또 하게 된다고(지금은 안 한다).


내가 마지막 답변자여서 작가님이 대답을 내놓았다. 인간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 대한 오래된 대답은 이것이었다.


-니체가 말하는 자기 서사의 최정점의 자리는 법정이에요.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변명, 혹은 항변이 가장 ‘이야기’라는 도구의 존재 목적이라는 거죠. 나는 잘못이 없다, 혹은 내가 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 나의 잘못은 아니라는 인정, 혹은 설명이 절실히 필요해서 평소에 이야기를 안 하는 사람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죠. 누구든지 간에.


이게 반드시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고, 가장 강한 자기 서사가 언제 나오는지에 대해, 오래전 철학자가 내놓은 답은 저렇습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인데 내가 말한 답변과도 일정 부분 겹치는 맥락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되돌아와서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 왜 하는가를 짚어보면 뭔가 큰 깨달음을 얻어서라기보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나 혹은 상처가 된 일에 대한 에피소드일 때가 많은 것 같다. 데이트 폭력, 가스 라이팅처럼 문제가 눈 앞에 보이는데도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들도 있고 차라리 대단한 문제면 어쩔 수 없구나 싶을 텐데, 엄마와 딸의 오래된 갈등 같은, 별 일 아닌데도 참 해결이 안 되는 문제들도 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지 못한 일은, 그냥 좀 아련하다. 가슴이 아플 정도는 아니고.


가끔 혼자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글을 쓰다가, 혹은 이미 작가가 된 사람들이 작가가 되기 위해 보낸 시간들에 관한 글을 읽으며, 예전의 어떤 지점에서 어떤 노력을 더 했었으면 나도 작가가 했을까 되짚어보기도 하는데,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내가 주어진 환경 내에서, 최선을 다 했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제 글은 위의 저 주제가 또 반복될 수 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이전 09화 모든 글은 쓰는 방식이 달라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