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걸 원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런 거.

다시 말해서, 별 거 아닌 것엔 감동받고 싶지 않아.

by 시은

<와이 우먼 킬> 시즌 2가 어제 끝났다.


와우.


초반엔 시즌1보다 재미가 덜한가 싶기도 했는데, 스타일이 다를 뿐 시즌2만의 색깔이 확실했다.


옷으로 비유하자면 시즌1은 최신의 현대적인 느낌이고 시즌2는 시즌1에 비해 클래식하다는 느낌이었다. 현대적인 느낌과 클래식한 느낌 중 어떤 게 더 우월하다,라고 할 수는 없으니 뭐가 더 재밌었다는 우열의 판단은 못 내리겠다. 둘 다 재밌다.


시즌2를 보면 느껴지는 반복적인 메시지가 있다.


‘나는 좀 더 나은 걸 원해.’

‘아니, 나는 최고의 것을 원해.’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평범하고 몸집이 큰 가정주부, 알마 필콧이다. 그녀의 꿈은 동네에서 영향력 있는 부인들의 정원 모임 <일리지언 파크 정원 클럽> 회원이 되는 것뿐. 하지만 장애물이 너무 많고 장애물에 번번이 걸려 들어가지 못한다. 그 클럽에 기를 쓰고 들어가고 싶어 하는 그녀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하며 이런 별 거 아닌 일에 애쓰는 ‘지금의 당신’보다 ‘예전의 당신’이 좋다고 말하자,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달하는 자신의 마음을 남편이 이해해주지 않자 그녀는 소리친다.



-나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바랐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믿게 했어. 그래서 자기에게 내던져진 찌꺼기에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찌꺼기를 삼킨 거야. 어느 날, 그 여자는 깨닫게 됐어. 더 받을 자격이 있다는 걸.


이 대사 중 ‘찌꺼기’라는 단어를 듣자 나는 갑자기 여자들이 종종 듣곤 하는 말이 떠올랐다.


여자들은 별 것 아닌 것에 감동받는다, 는 말.

별것도 아닌 것을 원한다는 말.


왜 여자는 별 것 아닌 것에 감동받고, 남자는 별 것 아닌 것에 감동을 받지 않는가.


여자들의 감수성이 더 풍부해서?

아니.


누린 게 없어서. 별 것 아닌 것조차 별로 누릴 수가 없었으니 작은 것 하나에 감동을 할 수밖에. 감동받을 게 적었으니(혹은 없었으니) 뭐라도 유입이 되면 그게 대단히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남자들은 별 것 아닌 것에는 감동을 안 받는다. 아니, 사실 어떤 남자들은 별것, 혹은 대단한 것에도 별로 감동을 안 받는다. 누리고 사는 항목에 ‘별 거 아닌 것’은 기본이고 ‘별 것, 대단한 것’ 다 풀옵션으로 들어가 있어서.




이쯤에서 개인적인 경험 하나만 예로 들자면 나는 ‘사과’에 목마른 편이었다.


내가 고등학생 때쯤 내가 훔치지 않은 남동생의 물건을 훔쳤다고 가족들이 나를 오해한 적이 있었다. 내 방을 뒤집어엎었는데도(내가 불쾌해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모두 함께 내 방을 샅샅이 뒤졌다) 물건이 나오지 않자 다시 그 물건이 있음 직한 경로를 역추적했는데 그 결과, 동생이 자기 방 깊숙이 숨겨놓고는 물건 둔 장소를 까먹고 나를 도둑으로 몬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밝혀진 후 어느 누구도 나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의심을 한 동생도, 같이 내 방을 뒤지고 동생 말만 믿고 나를 의심한 부모님도.


모든 상황이 밝혀졌고 이 상황에 대해 내가 사과를 요구하자 가족들은 ‘결과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 되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사과를 해야 하냐고 했다. 더불어 ‘나’라는 인간은 가족끼리 별 것도 아닌 일에 예민하게 굴며, 동생 허물을 감싸주지 않는 이기적인 누나라는 비난도 받았다.


누명도 내가 쓰고 비난도 내가 받고. 뭐, 특별한 일은 아니다.


mbc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귀남이(김희애)도 겪은 일이고 아마도 수많은 귀남이가 겪었던 일이었을 테니까.




나조차 몰랐는데, 오랫동안 누군가 나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면, 사과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곤 했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그 사람이 잘못을 해서 그 결과로 사과를 하는 건데 왜 네가 고마워하는 거냐고.


괜찮아, 하고 사과를 받아줄 수야 있지만 왜 고마워하기까지 하는 거냐고.


그 친구 말을 듣자 나도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그렇지, 상대방이 잘못을 해서 사과를 하는 건데 내가 왜 그걸 고마워하지?


왜냐하면, 내가 분명히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는 가족들 사이에 평생 놓여 있었으니까. 부당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하면 불쾌해했으면서도 보편적으로 사과를 받지 못하는 게 세상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버리게 되었으니까.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아주 오랫동안 내가 사과라는 걸 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게 길들여버렸으니까.


어느 순간, 나는 사과받는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게 그나마 덜 고통스러우니까.


그 결과, 나에게는 잘못을 한 사람의 사과라는 것조차 너무너무 대단한 것이 되어버렸다. 내가 정당하게 누려야 하는 거였는데. 별 거 아니었어야 할 그 당연한 경험의 데이터가 부족하니까 그 경험에 가치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에 고마움이 터져 나왔던 거다. 나도 모르게.


여하튼, 이제는 사과받는 게 합당한 상황일 때 더 이상 고마워하지 않는다. 사과는 사과고, 내가 고마워할 일이 아닌 것이다. 더불어, 사과해야 할 일에 사과하지 않는 인간을 보면 화가 난다. 그렇다고 매번 분노를 표출하며 살 수는 없으니 어지간하면 참고, 어떨 때는 따지고, 그러고 살 수 있는 정도의 인간이 되었다.


이게, 정상이다. 이제 겨우 정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욱더 큰 사과를 받고 싶을 때가 있다. 아주 그 사람이 무릎 꿇고 울면서 내가 진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게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절대 사과할 일이 아니거나, 그 정도로 사과할 일이 아닌 일일지도 모를 정도의 일인 걸 잘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원한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충분히 만족할 만큼보다 훨씬 더. 이 정도로 사과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마 나도 좀 더 나은 걸 원하거나, 어쩌면 최고의 것을 원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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