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에 콩깍지, 창작뽕
나는 시나리오 쓰는 관련학과에 들어가기 전부터 원래 이야기를 만드는 게 좋았다.
매력적인 소재를 떠올리는 것도 좋고, 가끔씩 어떤 기가 막히게 괜찮은 상황을 보고 그걸 언젠가 시나리오에 써먹어야지 하며 플롯화해서 정리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꽤 잘하는 것 같아서 관련학과를 진학한 이유도 꽤 컸다.
그중에서도 나는 무엇보다 플롯의 도입부부터 중간까지를 대본으로 꽤 잘 쓰는 편인 것 같았다. 딱히 배운 적도 없는데, 흠을 잡으려고 해도 프로만큼 꽤 그럴듯하게 말이다.
문제는 그게 도입부에서부터 중반까지만 이라는 것이다. 중반부터 개연성이 떨어지든, 비약이 심하든, 마무리가 황급히 지어지든, 이야기가 갈 곳을 잃고 헤매는 게 보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내가 엄청 좋아하는 일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잘하는 거 같으면 남들에게 대놓고 말은 차마 못 하지만 ‘혹시 이 분야에 내가 천재인가?’ 하는 생각을 몰래 하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끝까지 다 잘 쓰면 좋겠지만, 중반까지만이라도 이야기가 무리 없이 유려하게 흘러가게 잘 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시작조차 못 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이 힘든 걸,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쉽게 해낸다고? 하면서 자뻑의 시간을 보냈다.
이 황홀한 자뻑의 시기가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지만 글 쓰는 사람들 100명 중에 90명은 이런 자뻑의 시기가 분명히 있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중에 글 써볼 만큼 쓴 친구들끼리는 이걸 창작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이게 진짜 직업을 갖기 위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내가 내 글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 게 맞는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이러한 부분을 꽤 잘 쓰는 것 같다고 여태껏 믿어왔는데 내가 느끼는 그 자뻑이 합리적 판단인지 의심스럽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잘 썼다고 생각하는데 같은 공부를 하는 사람들도,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교수님들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게 맞을까? 진지하게 걱정이 되었다.
남들이 봤을 때도, 내가 보는 것처럼 내 글이 도입부와 중반까지는 괜찮지만 중반 이후부터 엉망진창인지, 사실은 처음부터 엉망진창인데 나 혼자만 내 노력이 가상한 나머지, 내 글에 콩깍지를 쓰고 ‘어이구 이쁜 내 글’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한 거다.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만약에 후자라면 정말 그건 노답이지 않겠는가. 이런 경우, 어디서부터 손을 댈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내 눈엔 잘 쓴 거라면 그 글의 어디가 잘못된 건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앞의 상황이라면 어쨌든 다행인 거다. 뒷부분이 엉성하다는 건 필력의 문제이고, 필력이라는 건 근력처럼 글이 뻗어 나아갈 힘을 내가 키우면 되는 거니까.
불안할 때는 주변에 많이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남들에게 내 글을 보여준다는 것이 오글거려도 그들로부터 어떠한 피드백이든 감당할 준비를 하고 내 글의 결함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안 보여주면 단점은 영원히 수정할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다행히 내 안목과 사람들의 안목은 거의 비슷했다. 과 친구들과 교수님, 그리고 전혀 시나리오에 대해 알지 못하는 다른 과 친구들조차 다들 도입부와 중반까지는 괜찮은데 중반부터 이상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됐어! 이제는 중반부터 쓰는 힘을 키우자!’
10년 정도 웬만큼 공부를 하다가 깨달았다. 도입부부터 중간까지 꽤 잘 썼다고 해서 그걸 재능이라고 생각한 것부터가 문제였다는 사실을. 사실은 시나리오라는 건 내가 쓰는 것처럼 그렇게 쓰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쓰면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기승전결에 대한 플롯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짜 놓고 그에 맞춰서 이야기를 써 나가야 길을 잃지 않는 법인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잘 써진다고 신나서 ‘기승’에 해당하는 대본을 신나게 써재끼다가 ‘전결’이라는 벽이 부딪히곤 했던 것이다. 매번.
타인의 평가와 내 평가가 동일하다고 해서 내 글에 콩깍지를 쓴 건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맞았다.
주변에 이것저것 글을 많이 쓰는데 완성을 못 하는 작가 지망생, 이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아마 과거의 나처럼 처음 부분이 중반까지 꽤 술술 써지는 글에 놀라 자신의 재능에 감탄하며 중반 이후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그거 아니다. 기승과 전결이 다 갖춰진 상태여야만 중반 이후를 고민해도 되는 것이지, 무작정 처음이 잘 써지는데 중반이 안 써지는 건, 사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을 쓰는 사람이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창작뽕은 뽕인 만큼 너무 오래 취하면 안 된다. 빠져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