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자기만의 집’이라는 빽
27살에 ‘자기 소유의 집’이 있는 친구가 있었다. 오래되고 작고 허름하지만 방 2개, 거실 1개에 주방이 있는 , 등기부등본을 떼면 그녀 이름으로 소유권이 인정되는 자기 소유의 집.
그녀가 그 집을 매매할 당시, 만약에 언제든 재개발되면 알박기 하지 말고 조용히 나가야 한다는 조항까지 있던, 하지만 20년째 재개발이 안 되고 있고, 향후 몇 년간 재개발될 확률이 낮은 오래된 빌라.
아무리 재개발을 목적으로 버티고 있는 낡은 빌라라고 해도 20대 중반에 자기만의 집이 있는 여자는 처음 봤다. 부모님이 물려주시거나, 도움을 받은 것도 없이 처절하다시피, 온전히 그녀의 힘으로 산 집이었다.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룬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녀 역시 쉽게 이룬 것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 직후 그녀는 집안 사정으로 원래 살던 집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가족은 각자 알아서 살다가 다시 뭉치기로 하고 흩어졌고, 그녀는 취업하자마자 고시원에서 거주해야 했다. 그러다 어떤 상황으로 인해 돈이 너무 없어서, 진짜 더 아낄 데도 없는데 고시원비마저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어떻게 해도, 그것 외에는 줄일 수 있는 항목이 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그녀는 회사에 얘기했다. 월세든 전세든 보증금 모을 몇 달 만이라도 회사 회의실에서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모두 퇴근 후 밤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공간이지 않느냐고, 진짜 갈 곳이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렇게 숙식을 해결했다. 세수는 건물 화장실에서, 씻는 건 퇴근 후 목욕탕이나 가끔은 동료 집에 간 김에 해결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주 5일 근무였지만 그녀는 퇴근 후에도 일했고 토, 일요일에도 일했다. 어떻게든 돈을 빨리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한다.
어떻게든 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모습에 대해서 처음에는 안쓰럽게 생각하던 사람들도, 연차도 낮고 어린 그녀의 월급이 월등히 높아지자 어린 게 돈독 올랐다고, 오버한다고 안 좋게 보고 자신이 없는 곳에서 뒷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독하다고, 남들 같으면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싶어도 이런 식으로는 부끄러워서 못 살 텐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인다고, 부러움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을 회사 사람들끼리 한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사람들은 상상도 안 할 일이겠지만, 돈 드는 데 없이 잘 수 있는 곳이 너무 절실했고, 그런 그 당시의 삶이 앞으로 계속될까 봐 너무 불안해서 주변에서 뒤에서 뭐라 수군거리든, 아니 사실 면전에 대놓고 뭐라 했든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거라고 그녀는 술을 마시며 털어놓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아무렇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무리 방범 시스템이 작동하고 문단속을 잘하고 잠자리에 눕는다고 해도, 텅빈 사무실에서 아무 보호 도구 없이 몇 달을 편하게 잠잘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것도 대학 갓 졸업한 20대의 어린 여자가. 그렇게 밤마다 회의실에서 자고, 악바리처럼 매일을 일한 것도 있겠지만 사실 그녀가 일을 잘한 덕분에, 생각보다 매출 성과가 엄청 좋았고, 빨리 많은 돈을 모았다. 그리고 그때 마침 좋은 매물도 나온 덕에 전세나 월세가 아닌, ‘자기 명의의 집’을 살 수 있었다.
그녀는 나쁜 의미로, 전형적이고 가부장적인데 그 와중에 집은 한 채 있는 우리 아버지 세대의 한국 남자처럼 굴기도 했는데 친구들에게 그런 것은 아니고, 꼭 자신의 남자 친구에게 꼭 ‘가부장적인데 집은 한채 있는 한국 남자’처럼 굴었다. 그녀는, 지금은 그녀의 남편이 된 그 당시의 남자 친구와 동거 중이었는데 기분이 좋을 때는 상관없지만 다투거나 기분이 나쁘면 집을 나갔다.
그녀의 남자 친구가 걱정이 되어 어딘지 묻기 위해 전화를 하면 항상 대부분의 경우, 다른 남자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신을 짜증 나게 한 남자 친구 욕을 하기 위해서.
다시 그게 원인이 되어 싸움이 심해지면 며칠이고 외박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온 그녀에게 남자 친구가 불만을 토로하면, 지친 그녀는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라고.
또 남자 친구가 뭐라 뭐라 하면 다시 그녀는,
-아, 그래서 어쩌라고오.
하며 화도 짜증도 내지 않고 한숨을 쉬고 이렇게 말했다.
-OO아, 아니꼬우면 니가 나가면 되잖아, 내 집에서.
남자 친구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냐고 하면 그녀는 그의 말을 끊고, 그녀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OO아, 싫으면 안 들어오면 되잖아, 여긴 내 집인데.
기승전, 내 집.
‘내 집’이 주는 감히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자신감. 누구의 비난을 받든 어디로 쫓겨날지 불안해할 필요 없는, 가장 든든한 내 백그라운드.
그녀는 목소리 자체도 예쁘지만 항상 너무 다정한 말투라서, 언젠가 한번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그녀는 매 순간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톤으로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렇게 다정한 톤으로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때도 그런 톤으로 말했다면 그녀의 메시지는 더 잘 전달되었을 것이다.
‘난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야.’
라는 단순하고 강렬한 메시지.
‘남자는 없어도 돼, 집만 있으면.’이라는 메시지 자체를 담고 있는 그녀의 삶이라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메시지. 거주할 곳조차 없던 불안한 시간, 그리고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면서 쟁취한 ‘자기만의 집’. 누구든 들이고 싶지 않으면 내보낼 수 있고, 들어가고 싶으면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강력하고 개인적이며 정서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보호를 받는 나만의 공간.
그 이후에 읽게 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도 인상적이긴 했지만, 내게는 ‘그녀의 삶’이 버지니아의 글보다 만 배는 강렬했다.
이미지 출처: 웹툰 <독립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