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네가 그럴 만한 자격이 없구나
오래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오빠를 위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과거의 나는 애정표현을 많이 하는 사람도 아니고 애교가 많은 것도 아니었는데 술에 취해 저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남자에게 푹 빠져서, 그가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남자 친구를 사귈 때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사랑을 해도, 그 사람을 위해 죽을 정도로 사랑한 적은 없었다. 엄마 빼고.
저 말을 하게 된 ‘사건의 배경’을 밝히면 이렇다.
1. 부산에 살고 있던 나는 A와 사귀다가 헤어졌다.
2.A가 이별을 미수긍, 2개월을 달랬는데 안 돼서 나도 지쳐서 연락 안 받음.
3. 그때부터 A가, 내가 다니는 회사 및 집 근처를 스토킹함. 주변 지인에게 몰래 내 험담함. 그 와중에 계속 사랑한다고, 다시 만나자고 나에게도 틈틈이 연락(쓰다 보니 느낀 건데 꽤 부지런했네. 나쁜 놈이 부지런한 게 이래서 무섭다).
4. 도저히 안 되겠어서(겸사겸사 꿈에도 도전할 겸) 서울로 도피성 독립
5.A가 그 소식을 알고 또 연락, 비련의 남주 코스프레
6. 서울에서 알게 된, 서로 호감을 가진 B와 술 먹고 있다가 B가 내 남자 친구라고 A에게 전화해서 떼내 줌.
7.B와 사귐.
B가 내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했다.
B는 A의 스토킹에 대한 내 고민을 듣고 나서는 자신이 ‘남자 대 남자’로 얘기하겠다고 A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들을 때나 멋있지, ‘남자 대 남자’라는 말을 현실에서 하면 웃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B에게 호감이 있으니까 ‘남자 대 남자’라는, 허세 가득한 이 말조차도 멋있었다.
하긴 그 당시의 나는 사귀기도 전인데도 B가 무슨 말을 하든 ‘멋있어. 나 운명의 남자.’ 하고 생각했다. 후… 과거의 내 자신, 이리 와, 한 대 맞자.
전화를 걸기 전, B가 물었다. A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 지. A는 나보다 3살 많았고, B는 나보다 4살 많았다. 한 마디로 A가 B보다 1살 어렸다.
내 전화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은 A는 B의 목소리를 듣고 놀란 듯했다. B가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 여자의 새로운 남자 친구다(아직 안 사귀고 있었지만 편의상 그렇게 말하겠다고 했다). 들어보니 내가 그쪽보다 1살 많다고 한 편하게 말하겠다. 이 여자가 너의 행동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냐, 아니지 않으냐. 우리 결혼까지 할 거고, 블라블라 블라.
그 이후로도 옳은 말, 구구절절 길게 했지만 내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멋있다… 하는 생각뿐. 한 2-3분 통화하더니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연락 안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전화를 받으니 ‘진짜 새 남자 친구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고, A는 알겠다고 잘 살라고 했다.
어이없게도, 내가 간곡하게 말할 때는 들어쳐먹지도 않던 A가, 얼굴도 본 적 없는 B의 말을 듣고는 수긍하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몇 달 뒤인가 딱 한번 더 연락이 오긴 했다. 결혼하게 되면 축하해주고 싶다고 청첩장 꼭 보내라고 했다. 네? 제가 왜요).
연인이었던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던 그가, 생전 만나본 적도 없는 B가 한 말을 서열 경쟁에서 진 수컷처럼 고분고분 들었다는 게 참 허무했다. 짐승들 서열 싸움도 아니고.
서론이 좀 길었는데, 여하튼 스토킹에서 구해준 고마움이 애정에 배가되어 더욱 내 운명의 상대 같았다.
내가 위에 ‘사건의 배경’이라고 쓴 걸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이 운명 같은 사랑은, 고작 28일 만에 끝이 났다.
정말이지 이 남자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남자였으면 했다. 무명이긴 하지만 배우이기도 했어서 ‘작가+배우’ 연인이 된 게 더욱 더 운명 같기도 했다.
다들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에 대한 영화 속 장면이 있을 텐데 나에게는 ‘타이타닉’ 속 로즈와 잭의 행동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미지였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로즈가 모든 사람이 말리지만 결국 잭을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의 하층부에 가서 도끼로 잭의 손을 풀어 그를 구하는 장면. 그녀가 무거운 도끼를 못 다룰까봐 잭이 연습삼아 도끼로 한 곳을 찍게 한 뒤 같은 곳을 찍어보게 하는 연습을 시키는데 처음과 전혀 다른 곳을 찍어버리자 흠칫 하지만, 결국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이제 진짜로 찍어보라고 하고, 그녀는 그렇게 잭을 구한다.
A와 함께 그런 상황에 빠졌으면.. 그냥 다른 사람들 말 듣고 구명보트 타러 갈 것 같았지만 B와 ‘타이타닉’ 같은 상황에 빠지면 나는 사람들 말 안 듣고 내가 죽든 말든 B를 구하러 갈 것이었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하지만 이 운명 같은 사랑이 28일 짜리라니. 운명 같은 사랑 치고 너무 짧은 감이 없진 않지만, 이별의 이유 만이라도 흔하더라도 ‘성격 차이’또는 ‘권태기’ 같은 거면 참 좋았을 텐데.
그의 개차반 같은 음주 습관과 음주 가치관 때문에 헤어졌다. 술만 마시면 자기보다 어린 사람에게 쌍욕, 술에 취하면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심지어 자기 할 일 하능 공익근무요원에게 쌍욕, 어머니에게도 윽박을 질렀다. 별 이유도 없이.
그런 모습을 사귄 지 20일 만에 보게 되었다.
내가 오빠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 B가 자신의 본모습을 쉽게 오픈해버린 걸까, 혹시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빨리 한 게 문제였을까, 생각한 적도 있는데 연인 사이에 애정표현을 아낌없이 한 게 왜 문제인가. 문제는, 그 녀석이 정말로 사랑하는 ‘자신의 난폭함’이 문제였다. 술만 마시면 그 사랑을 표출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었다.
그는 술 마시고 나서 느껴지는, 그 강렬한 흥분감, 알코올이 주는, 자제력을 잃는 기분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아니, 같았다가 아니라 그 기분을 정말 무척 사랑했다. 진짜 괜찮은 여자가 와도, 그는 그 여자보다 자신의 난폭함을 사랑할 남자였다.
그는 알코올이 선물해주는 자신의 그런 난폭함을 너무 사랑했다. 자신이 난폭해져서 주변 사람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걸 즐기면서 그 쾌감을 만끽하는 걸 매일 놓치기 싫어 매일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관대한 사람이 아니다. 위에 열거한 그의 무례함을 보고도, 그를 믿어보고 싶었다.
다른 남자였으면 저 모습을 본 직후에 바로 헤어졌을 테지만, 지독한 스토킹에서 나를 구해준 남자니까 이 운명적인 사랑을 지키고 싶었다.
길게도 말고, 오빠를 믿을 수 있게 나를 위해 딱 한 달만 술을 참아줄 수 있겠냐는 내 말에 그는 바로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날 저녁에 바로 술을 마셨다. 식사하면서 마시는 소주 한 병 정도는 술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말을 듣고, 뭐라고 말하면서 이 개소리를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라고 했던 것 같다. 낮에 한 약속을, 그날 저녁에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는 인간을 처음 봤다. 심지어 그의 목소리에선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한 달 금주해달라고 말했지만, 2주쯤 지나 너무 힘들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척 그날부터 마시라고 할 생각이었다.
혹시나 그 한 달 사이에 가까운 사람이 1. 상을 당했거나 2. 이혼을 했거나 3. 회사에서 잘려서, 그 사람을 위로해야 할 상황이면, 그 상황에서까지 금주 약속 지키라고 하며 먹지 말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다.
위 3가지 정도의 상황이면 마셔도 된다고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오늘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술을 마시는 거냐고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그는 밥을 먹으면서 술을 안 마시면 허전해서 먹었다고 했다. 이 정도 마시는 건 술이 아니라면서.
이 남자를 믿을 수 없겠구나, 라는 감이 왔다. 그가 하는 말에 의하면 ‘술을 마셨다’의 기준은 ‘거의 고주망태가 되어, 혀가 풀릴 정도’가 술을 마신 거였다. 술을 마시긴 했으나 걸음도 정상,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정도로 마신 건, 그의 기준에서는 ‘술을 마신 게 아니었다.’ 그래서 그 정도 술을 마신 상황에서는 운전도 쌉가능하다는 게 그가 말하는 ‘술을 마셨다’의 기준이었다.
… 어디서 이런 개 쌉소리를 하는 놈을 주웠을까.
부산에서 스토킹 하는 놈을 피했더니, 서울에서 음주운전이 음주운전이 아니라고 하는 미친놈을 만난 것이다.
사회적 기준이, 소주 1잔만 마시고 해도 음주운전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나는 그 기준을 존중하고 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 구성원이 그 기준을 존중하고 지킨다.
왜, 도대체, 니가 뭔데. 도대체 왜 소주 1병 마시고 운전하는 게 음주운전이 아니라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반나절 만에 약속을 어기는 남자와 말다툼하기도 싫었다. 무엇보다 글 쓸 에너지를 말다툼에 쓰게 되는 게 싫었다. 그래, 아무 말이나 지껄이세요, 하는 심정으로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약속한 날 이후 3일 동안, 그는 매일 ‘술이 아닌’ 소주 한 병 정도를 마셨고 4일째 아침, 나는 그런 그에게 우리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다. 그는 자신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왜 그러냐고,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쌍X,씨XX’ 이라는 단어가 거의 반인,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그래, 그만하자’는 내용이 주요 골자인 길고 긴 욕이 담긴 카톡을 받았다.
니가 사는 그곳을 불태워버리겠다는 내용과 함께. 나를 위해 죽을 수도 있겠다던 X이 겨우 3일 연속 술 마신 거 가지고 헤어지자는 게, 어디서 감히 사랑을 들먹이냐는 말과 함께. 씨X. 죽여버리겠다는 말과 함께.
도대체 이 새끼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걸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짜 너를 위해서는 죽을 생각 있었는데 너는 그럴 가치가 없는 놈이었구나. 짜증 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