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미친 거니, 라는 노래에 숨은 의미

사랑이 뭐가 문제냐고 말하는 남자와 사회 분위기

by 시은

내가 들었던 가장 무서운 이야기는 어떤 남자의 첫사랑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고등학생 때 프랑스어 선생님이 들려주셨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선생님이 대학생 시절 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했다.




그 대학교에는, 모든 학교에 존재하듯이 눈에 띄게 예쁜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리고 한 남학생이 그 여학생을 짝사랑했다.


그 남학생만 그 여학생을 사랑했겠느냐만은, 여하튼 그 남학생의 구애는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그 여학생은 그 남학생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았고, 어느 날 여학생에게 얘기 좀 하자고 그 남학생이 불러서 나갔다고 한자. 그가 한 이야기는, 내가 이렇게 너를 많이 좋아하고 표현하는데 왜 자기 마음을 안 받아주느냐, 는 것이었다. 왜긴, 그 여학생 기준에 안 찼겠지. 얼굴이든, 성격이든, 대화 코드든.


대화 중에 남학생이 화가 나서 그 여학생을 밀었는데 넘어지면서 돌에 부딪혔댔나, 얘기 좀 더 하자고 했는데 여학생이 가버리려고 하니까 붙잡았다가 여학생이 이거 놓으라길래 놨는데, 뿌리치려던 힘의 반동 때문에 넘어졌댔나 그랬다. 여하튼 결론은, 그렇게 그 자리에서 ‘우발적인 사고로’ 그 여학생이 넘어져서 죽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나 싶을 정도로, 그날 그 여학생이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어이없게, 사랑을 받아주지 않아서 그 남학생의 힐난을 듣다가.


남학생은 경찰에 자수했고, 선처를 빌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기 때문에 죽은 거라고, 처벌해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내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거의 선명하게 기억하고 또 무섭다고 한 이유는, 그녀의 부모가 그 남학생을 처벌하지 않기로 한 이유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그리 예쁜 척을 하더니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딸아이 죽은 것은 마음 아프지만 걔 콧대 높은 거 때문에 이 학생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느냐.’


정말 이 대사가 20살 딸이 죽은 부모가 한 말일까. 우리 반의 누군가가 물었다. 친딸이 아닌 게 아니냐고.


친자식이었고, 심지어 유일한 자식이었다고 한다. 우리보다 25살쯤 많았던 선생님이니 선생님과 그 두 학생이 대략 1960년생이라고 치면 그녀 부모님은 1935년생쯤 되셨겠다.


옛날 사람이라고 해도 20년 간 키운 딸자식이 죽었는데 ‘여자애가 얼굴 좀 예쁜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잘난 척을 하는지 그 남학생 마음을 알 것 같다.’며 죽은 여학생의 부모들이 이 남학생의 남은 미래가 걱정된다며 용서하고 선처를 바랐다고 한다.


그럼, 미래가 사라진 그녀의 억울함은? 그 여학생은 그 남학생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텐데.


어쨌거나 재판 끝에 결국 이 남학생은 별로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반성, 우발적 상황, 피해자 부모님의 선처 등등 다양한 이유들로 인해서 말이다.


죽은 그 여학생은 이 사실에 대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내가 또 이 이야기가 무서웠던 지점은, 선생님이 이 이야기가 마치 아련하고 진실한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말했던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여고생들인 우리가 듣기엔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난 이야기’였다.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가 상당히 그랬다. 사랑이 무슨 죄냐, 하는 인식. 그리고 남자의 사랑은 응원할 만한 것, 이라는 그런 인식. 그런 망할 인식이 쌓여서 관념이 되고 사회적 분위기가 되고 처벌을 하지 않아도 되는 지경까지 되어버렸다.


그렇게 여자의 목숨이 쉽게 사라졌다. 감히 ‘남자의 사랑’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르게는 ‘남자의 마음’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10년 뒤, 28살의 내가 전 남자 친구에게 스토킹을 당하다 설득시킬 수 없자 서울로 도망을 친 것도, 고등학 생 때 들은 이 이야기가 무의식에 있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내 전 남자 친구 역시 스토킹을 하는 것에 죄책감이 없었다. 우린 헤어졌고 오빠가 이러는 거 무섭고 스트레스 받으니 그만해달라는 나의 부탁에, 너와 헤어진 내 마음보다 더 괴롭겠냐며 나를 비난했다. 견디다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그를 설득할 의견을 물으면, 너를 못 놓아줄 정도로 사랑한다는데 그냥 다시 받아주라는 말 뿐이었다. 도저히 안 맞고 못 견디겠어서 헤어졌는데, 헤어지고 나서 괴롭히니 그냥 다시 사귀라는 건 말인가 방귀인가. 남자기만 하면 괜찮은 놈이건 개차반인 놈이건 내 생각 따윈 하지 말고 무조건 남자 말 들으라는 말일까.


아니면 죽기 싫으면 계속 사귀라는, 그런 맥락일까?


그리고 솔직히 이 남자친구가 연애 때 하던 행동들을 보면, 결혼하면 손찌검할 가능성도 있어보였던 것도 헤어진 이유 중에 있었다. 사람 일은 모르지만, 내 눈엔 그가 그래보였다. 그런 놈과 계속 만나라니.




그가 나를 죽일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도망친 건 1980년의 그 남학생도, 그 여학생을 죽이려는 의도가 없었지만 그 여학생이 죽었던 것처럼 사람 일, 아니 ‘여자 목숨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런 남자들을 쉽게 용서하는 피해자의 부모와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아직 한 번도 안 일어난 일은 앞으로도 일어나기 힘들지만, 한 번이라도 일어났던 일은 계속 일어난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우발적으로 내가 죽는다 해도, 아무도 나를 위해 그를 처벌해달라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게 자리 잡혔다.


남자의 사랑을 거절하는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고, 자기 목숨은 자기가 알아서 지켜야 한다는 게 그날 이야기의 교훈이라면 교훈이었다.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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