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굶주려 있던 것이 그 거미줄에 있었다.
내가 쓴 10개의 글.
지금 글까지 총 10개의 글 중 7개가 한 남자와 겪었던 에피소드들이다.
가스라이팅, 스토킹이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쓰겠다고 목차를 쓸 때부터 가장 많이 이야기하게 될 사람도 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내가 그와의 연애를 하며 가장 이해를 못 했던 건, 나 자신이었다. 나는 평소의 나와는 다르게 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기 어려워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헤어지기가 어려웠다고 해야 할까. 정말 평소의 나와는 다르게.
모르겠다. 사람들은 일, 이주일, 길면 한 달 사귀고 헤어지는 건 이별도 아니라고 하는데 20대 중반까지 나는 다 그 정도 만나다가 헤어졌다(그래서 별로 슬프지도 않았다). 그냥 연애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좋은지도 모르겠고 남들 다 하니 나는 굳이 안 해도 되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꾸준히 정성을 보이고 사귀자고 하면 사귀기는 했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누군가의 마음을 계속 거절하나 하는 마음도 있고 이 친구가 너무 좋아서 사귄다기보다, 만나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겠지 싶었다. 아마, 주변에서 20대에 남자 많이 만나야 한다, 왜 남자 안 만나냐 라는 말이 지겨워서 만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주변의 목소리 때문에 어쨌든 남자가 있어야 여자의 인생이 완성된다, 는 입장도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내 마음이 평화로울 땐 괜찮은데 그렇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열어보이기 싫고 기대기도 싫었다. 결국 글 쓰는 것 외엔 이게 다 짐 같고, 시간을 뺏기는 일 같았다.
그래서 대부분 일이주일, 길면 한 달 만에 헤어지자고 말하게 되곤 했다(아주 나중에 내가 했던 연애 방식이 회피성 연애의 일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사귀고 헤어진 사람이 4-5명 된다. 누군가가 ‘그게 뭐 사귄 거냐!!’ 라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포인트는 그만큼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만난 사람들이 일, 이주일만에 헤어질 정도로 그렇게 다 별로였냐면, 괜찮은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무척 잘생긴 사람도 있었다. 성격도 괜찮았다. 헤어지고 몇 년 뒤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얘가 이렇게 잘 생겼었나?’ 싶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다시 사귀고 싶진 않았고.
잘생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 마음의 여유였다. 그 당시 나는 누굴 만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건 상대방이 아무리 괜찮아도 누굴 만날 수 없는 확실한 이유였다.
여하튼 연애 같지도 않은 일,이주일 짜리 연애나 하고 살다가 사귀게 된 지금 나에게 7개의 에피소드를 준 A 와도 제일 처음 일주일 만에 헤어질 뻔 하긴 했다.
사귀어보면 알지 않는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파악 못 해도, 내가 이 사람과 맞는지, 안 맞는지 말이다. 안 맞았다.
나는 상황 판단을 아주 빨리 한다. 일주일 되던 날, 회사 점심시간에 헤어지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섣부르게 사귄 것 같다고. 그는 아직 자신의 좋은 점을 네가 몰라서 그러는 것 같으니 좀더 만나보자고, 자신이 진짜 괜찮은 남자라고 했다. 일주일 만나고 겪어본 데이터가 내게 보내준 시그널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별로였다. 하지만 나는 좀더 만나보자는 그의 말에 수긍했다.
앞에도 한번 언급했지만 사회적 지위가 어찌 됐건 여자는 남자가 있어야 그 인생이 완성된다, 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있었고, 20대 후반까지 1달을 못 넘기는 연애만 하다가 ‘결혼도 못 하고 혼자 사는 하자 있는 여자’ 가 될까 봐 조바심이 났었다.
내가 사귄 지 일주일 만에 헤어지자고 말한 이후, 그가 변했느냐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문제는 이전 연애와 똑같이 일주일 만에 헤어지자고 말한 내가 너무 못된 애 같아서 내가 더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전 연애에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한 번 이별을 결심하고 나면 상대방이 아무리 설득하려고 해도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말에 귀를 닫고 어떻게든 헤어지고야 말았다. 이별을 마음 먹은 순간 그걸 이루는 데 일주일을 넘긴 적이 없었다.
울건, 화를 내건, 진상을 부리건, 무조건 나는 헤어지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 남자친구와는 그게 쉽지 않았다. 잘 생겼냐고? 전혀.
이 남자친구는 내가 처음 만나본 연상이었다.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많긴 했지만 섬세하게 내 주변 친구들을 잘 챙겼고 내 기분이 상하게 하는 일 이후엔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티를 내며 사과를 했고 내 주변 사람들까지 내 지인이라는 이유로 살뜰하게 챙겼다.
사실 그게 좀 멋있었다. 나중에 내 부모님한테도 잘 할 것 같았고 동갑이나 나보다 어린 친구를 만날 때는 본 적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묘하게 나를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고 들었다.
일단 옷 입는 스타일. 누구나 20대 후반쯤 되면 자기가 어떤 스타일의 옷이 잘 어울리는지 거의 안다. 절대 안 어울리는 스타일도 알고. 언젠가 데이트를 하다가 그가 나에게 꼭 사주고 싶은 스타일의 원피스라며 옷가게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사실 나도 도전한 적이 있던 그 원피스는 나에게 진짜 안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그 원피스를 입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미 안 어울릴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계속 간곡히 부탁하는 것을 거절하자니 또 내가 ‘나쁜 여자’가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입고 나와서 거울에 비춰 보자, 누가 봐도 안 어울리는 걸 알 수 있게 안 어울렸다.
그는 길이감이 문제네, 색이 문제네 하며 조금씩 다른, 비슷한 스타일의 원피스를 다시 입어보자고 했다. 나는 그 한 벌 입은 것만으로 충분해서 더 이상 입어보기 싫었지만 결국은 골라준 것들을 다 입었다. 평소에 내 주변까지 잘 챙기는 그의 기분을 맞춰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어울리는 것은 없었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날 헤어지면서 우리 둘 다 묘하게 기분이 좀 상했다.
다음날, 그는 내가 다니는 회사에 사랑꾼 같은 메시지를 첨부한 점심을 회사 직원 수만큼 주문해서 어제는 자신이 미안했다고, 배려심이 부족했다고 사과했다.
사람들은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지만 봐주라고 했고, 나는 개인적 일로 주변의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의 사과로 인해 기분이 풀렸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이어야 좋은 거긴 해도, 내가 은근히 주목받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특별히 누군가의 잘못도 아니고, 그렇다고 크게 다툰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이 정도 이벤트를 벌여 사과할 일도 아니었다.
그냥 다음 데이트 때, 맥주 한 잔 하면서 다음엔 그러지 말자, 그날 우리 왜 그랬지 하고 풀어도 되는 정도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알 정도로 공개적인 사과를 받으니 좋았다.
정말 나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문제는 이게 반복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것, 혹은 원하지 않는 걸 내가 들어줄 때까지 계속 시켰다. 그로 인해 내 기분이 나빠지면 내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물론, 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을 사주었고 꼭 내 친구들에게까지 저녁을 사면서 자신이 미안해한다는 걸 알렸다.
그리고는 나중에 대화를 하다가 이 때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자신이 관대한 사람이라서 용서해주는 거’ 라고 꼭 짚고 넘어갔다. 나는 우리가 화해를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자신이 매번 용서해준 것이라고, 자신 같은 남자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동의하지 않았지만 넘어갈 수 있었다.
내가 간신히 누르고 있던 인내심의 제어 버튼에서 손을 떼게 한 건, 내가 대화를 시도할 때마다 언제부턴가 그가 반복하는 말 때문이었다.
-니가 갑이야?
그 상황이 갑 운운할 상황이 결코 아니었음에도.
예를 들면 약속시간에 내가 일찍 나와서 기다렸다고 투정을 부리면 ‘니가 갑이야?’ 라고 하고 약속시간에 내가 조금 늦으면 ‘니가 갑이네.’ 직장에서 서운한 일이 있어서 털어놓으면 ‘데이트분위기 어쩔 건데. 니가 갑이야?’ 라고 했다.
그의 ‘기승전 니가 갑이야’ 소리에 어느 순간부터 정말 ‘내가 이 연애에서 갑질을 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 번 자기검열을 하게 되자 계속 하게 되었다.
그와 만날 때 뿐만 아니라 혼자 있을 때도. 그러다 보니 내가 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이 관계를, 이 연애를 유지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 연애를 계속 하면 나는 이 지긋지긋한 자기검열을 계속 해야 할 것 같았고, 나는 나에 대한 자기검열을 그만하고 싶었다.
그놈의 갑,갑. 그가 가끔씩 먹이 주듯 던져주는 다정함은, 내가 매일 매시간 겪는 자기검열로 인한 고통에 비하면 새똥만큼도 되지 않았다.
정말 갑갑했다.
그리고 헤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진짜 ‘갑’ 이었다면 그는 절대 저딴 소리를 할 수 없다는 걸.
예를 들어 회사에서 대표님이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갈구고 빡치게 한다고 치자.
그런다고 우리가 대표님한테 ‘대표님이 갑이세요?’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왜? 진짜 갑이니까. 하지만 대표님이 우리한테 ‘김 대리가 갑이야?’ 라고 할 수 있겠지. 대표님이 갑이니까.
결국 갑질을 한 건 그였다. 뭘 믿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가스라이팅/스토킹’ 이야기 대단원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니 내가 잘생기지도, 성격이 좋지도 않은 그와 헤어지기 쉽지 않았던 이유의 답을 말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답은 항상 그렇듯 본문에 나와있다.
그가 ‘내가 싫어하는 것, 혹은 원하지 않는 걸 내가 들어줄 때까지 계속 시키는 사람이었다’ 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것을 시키는 사람, 원하는 모습대로 나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 그 모습은 나의 엄마, 아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내 기분이 나빠지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대부분의 부모님이 자식에게 그렇듯이, 나의 부모님도 내가 자신들 말고 다른 부모님/다른 집을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알고 계셨다. ‘니가 기분 나쁘면 어쩔 건데.’ ‘집을 나갈 거야 어쩔 거야.’ ‘니 주제에.’ 하면서 내 마음이 넝마 조각처럼 너덜너덜해지건 말건 내버려 두었다.
그러면 결국 무거운 집안 분위기를 견딜 수 없어 내가 부모님께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표면적인 화해를 시도하거나 용서를 빌면서 내가 뭘 잘못했나 싶고, 태어난 게 더럽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나의 부모님과 꼭 닮아 있었지만 부모님이 결코 하지 않았던, 그의 화해의 시도.
그것도 우리 둘만의 화해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큰 화해의 제스처.
화해에 중독되었다고 하면 이상할까. 부모님과의 다툼 이후 단 한번도 화해를 경험해보지 못한 나는 ‘화해’에 굶주려 있었다.
화해에 굶주려 있던 나를 위로하고, 다투긴 했어도 끝내 나와의 관계를 다지려 하는 그의 노력에, 부모님에게서 외면받은 내 마음이 채워졌던 거다.
그래서 마치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그를 벗어날 수가 없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