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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글

에세이 쓰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좋겠다

by 시은

나는 사실 에세이를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200개가 넘는 에세이를 쓰고 나서 이게 과연 할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치면 회사 출근한 날이 1000번이 넘어도 회사를 크게 안 좋아할 수 있는, 그런 마음처럼 딱히 에세이 쓰는 게, 막 엄청 좋지는 않다. 쓰고 싶어 미치겠는, 그런 건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작가라지만, 나는 사실 에세이 작가도 아니고 내 삶에 대한 에세이 쓰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왜 안 좋아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돈이 안 되는 글이기 때문에 안 좋아하는 것인지,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 ‘한과 넋두리’를 글감으로 쓰기 때문인지.


역시 모르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가스 라이팅과 스토킹에 대한 글을 매주 쓰겠습니다, 해 놓고 그 약속을 지키지도 않았다. 그걸 가지고 ‘왜 독자와의 약속을 안 지키는 것이냐, 이 무책임한 작가 놈아.’ 하는 사람도 없었거니와(있었으면 열심히 썼으려나) 이걸 묶어서 책을 낼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브런치 북으로 내기야 하겠지만 큰 기대는 없고, 뭐 그러다 보니 목차가 될 만한 타이틀은 다 뽑아 놓고도 그렇게 열심히 써지지가 않았다. 남이 쓴 에세이는 뭐 썼나 궁금해하면서 1,2월에만 에세이류 책을 5권을 샀으면서도.


여하튼, 나는 에세이를 열심히 쓰기 싫다. 아니, 생각해보니 열심히 쓰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새벽까지 잠 안 자고 쓴 글도 있다. 그 정도면 분명 열심히 썼다. 열심히 썼는데, 그 열심과 끈기가 내가 원하던 기간만큼 가지는 않았다. 한 달 반은 갈 줄 알았는데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글 10개가 많은 것도 아니니 그거 다 쓰고 게을러지길 바랬는데 내 뜻대로 안 되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끈기의 심지를 다시 불태워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는 그저 퇴근하면 나면 모든 억압을 벗어던지고, 그러고는 널브러지고 마는 정도의 심지의 인간이었다.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원래 쓰고 싶었던 시나리오의 소재가 스토킹과 가스 라이팅이 서사에 깔려 있는 이야기였다. 한 2-3년 전부터 큰 줄거리는 만들었지만 그걸 장편의 묵직한 이야기를 가진 시나리오로 쓴다는 건 정말 공이 많이 들어서, 쓰다 말다 쓰다 말다 한 게 벌써 3년 째다.


온종일 그 이야기만 생각해야 하고. 그래도 잘 써지지 않는 때도 많고. 말해 뭐하나. 장편을 완성하는 건 정말 힘들다. 죽자 사자 쓰고 나서도 그게 끝이 아니다.


완성하고 나면 전체적으로 문제는 없는지, 매끄러운 전개인지, 퇴고도 여러 번 해야 한다. 퇴고, 그건 아주 집요하고 섬세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먹고 살려면 회사일을 해내면서 매일의 집안일도 해내야 하는데, 그 와중에 글도 쓰고, 다 쓰고 나면 나중에는 퇴고도 해야 한다. 그렇게 매 순간 잘 갈아진 질 높은 집중력을 ‘집요하고 꾸준하게 발휘해야’ 제대로 된 글을 완성할 수 있다. 몇 년 간을 그렇게 ‘집요하고 꾸준하게’ 해야 하는데 그럴 힘이 없다. 정말, 진짜 그럴 여력이 없다.


단편도 마찬가지겠지만 장편 퇴고는 진짜 더럽게 힘들다. 그런데도 나는 시나리오 쓰는 건 너무 좋다. 문제는 이제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여가면서 쓸 시간이 없다. 정확히는 그럴 여력이 없다. 쓰고 싶어 미치겠지만 쓸 수 없다.


그래서 ‘그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 마음’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풀어보고자 그 주제의 에세이를 써보겠다, 고 했는데 개뿔, 쓰기 싫다. 허구의 세계를 만드는 건 힘들어도 재미있고 좋은데, 진짜 현실의 이야기를 쓰는 건, 나는 솔직히 그냥 그렇다.


재미없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다. 에세이라는 게 제가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쓰는 게 많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 내가, 그게 재미있을 리가 있나, 내 입장에서. 이미 다 아는데.


혹시 에세이라는 글의 특성상,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여과 없이 드러나는 글이라서 별로인 걸까.


아니, 그게 아니다. 시나리오라는 허구의 세계에는 판타지가 있는데 에세이에는 판타지가 없어서 싫다.


내가 쓰는 이야기 속의 판타지가 사실 아름답거나 낭만적인 건 아니지만, 나는 어쨌든 ‘내가 생각하는 세계’를 만드는 게 훨씬 재미있다. 쓰고 있으면 행복하다. 쓸수록, 내가 원하는 내가 된다. 내가 원하는 내가, 사실 그리 대단한 건 아닐지라도.


밸런스 게임처럼 ‘쓰는 거 vs 안 쓰는 거’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쓰는 걸 택하겠지만 ‘에세이 vs 시나리오’ 둘 중에 하나 선택해야 하면 두 말할 것도 없이 시나리오다.


에세이 쓰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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