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야. 도리야. 이번 시연 대박! 사진 보이냐?"
출근하자마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자기 자리로 부른 팀장님.
얼굴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팀장님이 내미신 사진을 본 아빠는
음...
솔직히 뭘 봐야 할지 몰랐어.
그냥 넓은 시연장에 앉아있는 100명 정도 돼 보이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이라도 하는 듯이 빔프로젝트로 쏜 스크린 앞에서 뭔가
설명하는 듯한 팀장님.
그런 팀장님을 바라보는, 뭔가 적고 있는 듯한, 간간히 졸고 있는,
그리고 회사에서 몇 번 마주쳤던 것 같은 주변에 어슬렁 거리는 듯한
사람들.
'뭐야.. 뭘 보라는 거야? 사람 수 세보란 소린가?'
그래도 반응은 해줘야지 싶어서.
"우와 대단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연하신 거예요?"
아빠의 성의 없는 기계적인 반응에 팀장님은 장난스레
아빠 팔을 툭 치시더니
"인마 어딜 보는 거야? 스크린을 봐야지. 봐라. 네가 짠 프로그램이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날.
인마 너 이제 진짜 프로그래머 된 거야~"
팀장님이 가리키는 사진 속 스크린에는
그동안 내가 밤새워가며 짠 프로그램이 실행 중이었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이지.
물론 학교 다닐 때에도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만들긴 했었지만.
보통 교수님한테 제출할 과제 정도였지 누군가에게
내 프로그램을 보여줄 일은 없었기에 신기하기도 하면서
뭔가 벅차오르는 느낌이 들다가도.
'그럼 이제까진 가짜 프로그래머였나...'
하는 생각에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살짝 흥분되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더라고.
"야 또 반응은 얼마나 좋았는지 알아? 너 내가 이 프로젝트
대박이라고 나만 믿... 야! 김세찬이!"
그때 출근하고 있는 김 과장을 팀장님은 불러 세웠어.
"네?"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며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김 과장.
방금 전까지 신나 보이던 팀장님의 표정은 어느새 화난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지.
"아무튼 고생 많았다. 도리는 가서 일 봐. 김세찬이 넌 나 좀 보자.
흡연실로 와봐"
사무실문을 나서는 김 과장과 팀장님. 아니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팀장님한테 김 과장이 끌려나가는 느낌이었어.
"좋냐? 어? 칭찬받으니까 좋냐고~"
"헤헤 나쁘진 않네요."
자리에 앉자마자 장난스럽게 말을 던지는 경태형.
그런데 갑자기 내 얼굴을 슥 한번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는 거야.
"좋댄다.. 넌 인마 이제 끝났어."
프로그램도 지시한 데까지 완벽하게 끝내고, 시연회도 잘 끝나고,
그로 인해 칭찬까지 받았는데 끝났다니...
혹시 김 과장 일 때문인가 싶어 조심스레 물었지.
"과장님 때문에요? 많이 혼나실까요..?"
내 말에 경태형은 갑자기 의자 등받이에 몸을 눕히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라고
"뭔 소리여? 내가 그 양반 걱정을 왜 해? 너 말이야 너."
"제가요? 왜요?"
"야 봐봐라 세찬이 형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너도 금방 할 수 있는 거
그거 못해서 그렇게 질질 끌었겠냐?"
"아니요..."
그래 이상했어. 한 회사에 과장까지 단 사람이. 얼마 전까지 학생이었던
내가 금방 끝낼 수 있는걸 왜 그렇게 안 하는 건지 말야.
야근시간에는 맨날 게하고 영화나 보면서 말이지.
경태형은 누가 들을까 싶은지 목소리를 낮춰 귓속말처럼
말을 이어갔어.
"니가 사회생활이 처음이라서 모르는 것 같은데.
회사에서는 해달라는 대로 다해주면 안 돼"
"왜요?"
"니가 빨리하면. 아 애는 이거 하는데 이 정도 시간이 걸리는구나.
그럼 다음에도 비슷하게 걸리겠지?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아..."
순간 숨이 턱 막히더라. 이번에야 전에 해놓았던 것도 있고, 아직
초기단계라 금방 해냈는데. 점점 더 어렵고 복잡해질 텐데
그때도 이번일을 들먹이면서 '왜 이렇게 늦냐!' 하며 타박할
팀장님을 생각하니 머리까지 어질어질한 것 같더라고.
"더 무서운 건 뭔지 아냐?"
"글쎄요.. 더 있나요..?"
체념한 듯 멍한 눈빛으로 묻는 나를 보던 경태형은 의자를 돌려
자기 책상 모니터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마지막 말을 이었어.
"일 잘하고, 빨리 끝내니 일을 산더미처럼 줄 거다. 크크큭
축하한다 일복 터진 거~"
슬쩍 웃으면서 놀려대는 경태형.
괜한 걱정에 우울해하고 있는데. 그때 김 과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내 앞에 서더니 경태형 의자를 발로 살짝 치는 거야.
"야 비켜봐 도리랑 애기 좀 하게."
"아 또 왜 발로 차고 그래~"
"너 나가서 담배 하나 피고 와라"
"... 살살해요. 재 안 그래도 잔뜩 쫄아 있으니까.."
주섬주섬 담배를 챙겨 나가는 경태형.
경태형 의자를 당겨 앉은 김 과장은 한동안 말없이 아빠를 응시하며
화를 삭히는 모습이었어.
"너 팀장님한테 뭐라고 그랬냐?"
"저... 저요? 아무 말씀도..."
사실이었어. 그동안의 김 과장의 행보를 전부 일러바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러지 않았잖아?
오히려 바쁘셨다고 감싸줬으면 감싸줬지 말야.
팀장님께 무슨 말을 듣고 와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괜히 서운하더라고
"그래 니가 무슨 말을 했겠냐? 그런데 복귀첫날부터 저 양반 왜 저래?"
"팀장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뭐라고 하셨으면 뭐? 니가 알아서 뭐 하게?"
궁금해하지도 말라는 듯이 딱 잘라 말하는 김 과장.
팔짱을 끼고 앉은 자세가 마치 '나 지금 화났어!'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어.
"프로그램도 문제없이 전달했다며?
시연도 잘 끝났다면서 왜 지X이야 지X이."
팀장님이 정말 왜 화가 났는지 감조차 못 잡은 채로 말이지.
"쉬엄쉬엄해. 너 때문에 나까지 욕먹잖아."
"네.."
지가 열심히 하면 될 일이지 왜 잘하고 있는 날 걸고넘어지나
싶었지만 아까 경태형의 말이 떠오르자.
'그럴 수 있지..'
하고 현실과 타협해 버리는 아빠였지.
"짠! 피곤할 땐 달달한 게 최고지!
땅콩크림라떼 이거 신메뉴라는데 고소한 냄새가~
뭐랄까? 땅콩버터랑 우유랑 믹스한 느낌?
한번 먹어봐~"
12시 40분.
점심을 먹고 자리에 앉아. 오늘은 졸지 말자고 다짐한 게 무색하게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빠의 눈앞에
커피를 들이미는 정현이.
"땅콩버터.. 우유... 야.. 생각만 해도 니글거리는데..?"
"어? 아니야. 사람들 이거 많이 사가던데? 다른 때보다 줄도 길었어"
"고맙긴 한데... 나 때문에 돈 너무 많이 쓰는 거 아냐?
해주는 것도 없는데..."
매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종종 점심시간에 커피, 에너지 음료 등을
사다 주는 정현이. 아빠가 표현이 서툰 건 알지? 고맙단 말은 잘 못해도
항상 마음으로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있었기에. 그 배려가
점점 부담이 되고 있는 중이었지.
아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 말야. 돈도 없고...
"오늘은 내가 사주는 건데? 나한테 고마워하면 되겠네."
"아.. 감사합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한 손에 커피를 든 채로 사무실로 들어오는 민차장.
정현이와 아빠의 대화를 들은 건지. 살짝 웃으며 대화에 참여하는
민예서 차장이었어.
"너네 둘 연애하니? 친구 아니야? 친구끼리 뭘 해줄 게 있네 없네 하고 있어?"
"그래도 정현이가 맨날 챙겨주는데. 전 받기만 하니까..."
빨대로 커피를 한 모금 빨아들이며 정현이와 아빠를 번갈아 보던
민차장.
"이야~ 난 땅콩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거 진짜 맛있네?"
"그치 언니? 거봐 사람들이 괜히 줄 서있는 게 아니었다니.."
"차. 장. 님."
"아니었다니까요 차장님.."
순간 단호한 눈빛으로 정현이를 바라보는 민차장 앞에서.
호칭을 바로잡는 정현이었어.
그런 그녀들을 졸린 눈으로 멍하니 보고 있는데.
갑자기 민차장이 내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입을 떼는 거야.
"스탬플러 좀 빌려줘. 내께 어디 갔는지 못 찾겠네?"
"아 네.. 여기"
스템플러를 받아 든 민차장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비치더니
"고마워~ 커피값은 이걸로 됐네. 거봐 해줄 수 있는 게 있잖아."
한마디 남겨놓고 자리로 돌아가는 민차장.
"오.. 쿨해.. 역시 우리 언니야! 차장님 같이 가요!"
그런 민차장을 한눈에 반한 이를 쫓아가는 사람처럼
그 뒤를 졸졸 따라가는 정현이었지.
오랜만에 야근 없이 집으로 가는 퇴근길.
담배를 문체 꽉 막힌 도로에서 펼쳐지는 자동차 후미등 빨간 불빛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알 수 없는 이유에 왠지 우울해지는 거야.
아니 어쩌면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 때문인지도 모르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어.
"오! 도리아저씨? 퇴근 중이야?"
"응 몸은 좀 어때?"
"나? 회복 중이다요! 많이 좋아졌어! 이제 혼자 다 할 수 있다요!"
"다행이네 밥은? 먹었어?"
임신중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를 했던 엄마라 항상
회복이 걱정이었지. 병원에서도 자연분만보다 회복이 더딜 거라는 애기를
많이 들어왔었거든.
"이제 좀 있다 먹을 거지요~ 아저씨는?"
"나도 먹어야지. 미역국 먹는 거야? 출산 후에 그만한 게 없다는데?"
"하아.. 미역국.. 지겨워.. 다른 거 먹을래. 다른 거 먹을 거야.."
미역국 먹으란 말에 한숨 팍 쉬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엄마였어.
"그런데 오늘도 도리아저씨 목소리가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어서 걱정이다~"
내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걱정을 했는지 이런 얘기를
엄마에게 하고 싶지 않았어. 괜히 걱정할 것 같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데 혹여라도 미안해하거나 가슴 아파할까 봐 말이지.
"도리아저씨~ 이번 주말에 올 거지?"
"글세? 왜?"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처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는데 드는 고속도로 통행료와
기름값 때문에 안 가도 되면 가지 말자란 생각으로 한번 떠보듯이
물어봤지.
"음.. 안되는데? 할 말 있는데?"
아빠가 뭔가 자기 예상과 다른 대답을 했다는 듯이 고민하는 듯
조심히 말하는 엄마.
'할 말? 할 말이란 게 뭐지?'
보통 그렇잖아?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인데 지금은 말 못 하고
만나서 해야만 하는 말이라.. 그건 중요한 말일 거고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다시 내뱉으면서 물었어.
"지금 하면 되지?"
"안되는데? 오면 같이 얘기하자고 했는데..?"
"누가?"
"가족들이.."
가족들이 나와 할 말이 있다? 정말 감조차 못 잡겠더라고.
내가 또 실수한 게 있나 싶기도 하고 잘못한 게 있나? 대체 언제?
병원에서 누워만 있었다고 다들 화가 났나?
별에별 생각이 다 들어 머리는 복잡해지고 있었어.
"네 가족은 이제 나하고 아기야. 그게 우선이어야 한다고.."
뜬금없는 말로 서운함을 내뱉었지만. 두 달 가까이 떨어져 있어서
그랬을까? 우리가 함께 선택한 결과임에도. 나는 점점 엄마에게서
멀어져 가고 엄마는 처가 식구들 품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나 봐. 가족들이라는 그 말이 너는 남이야 라는 말로
아빠에겐 다가왔으니 말야.
"아니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음.."
"그럼 뭔데? 일단 매를 맞더라도 이유라도 알고 맞자."
꼬치꼬치 캐묻는 아빠의 질문에 엄마는 잠시 고민하는 듯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어.
"가족들이.. 아니 친정식구들이 당신 회사 그만두고
여기로 들어와서 사는 건 어떠냐고 해서..."
순간 머리를 얻어맞는 느낌이었어. 그것도 아주 큰 망치로 말이야.
프로젝트 때문에 아둥 바둥 하는것도, 어떻게든 먹고살려고
발버둥 치는 것도, 뭐라도 해보려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허우적 대는 것도. 그냥 다 무시당하고 없던 일로 돼버리는
기분이었지.
"나.. 진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아빠의 목소리에서 엄마는 느꼈던 걸까? 아빠의 허망함을 말야.
"아니 아니 아저씨가 못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누가 그러는데? 대체? 누가 나 포기하고 들어와 살으래?"
장모님이겠지. 또 장모님이겠지. 날 싫어하니까. 날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시고
항상 부족하게 보시니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높아지는 언성은
더 이상 아빠 혼자서 주체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
"워워 도리아저씨 화내지 마.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누구냐고. 누가 그런 소릴 하냐고 장모님이지?"
"저번주에 언니네랑, 이모랑 아기 보러 와서 삼촌이랑 해서 다 같이
저녁 먹었거든"
'그럼 처형인가? 이모? 삼촌은 아닐 것 같은데...'
누가 됐던 화가 났어.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정하고
나한테 통보하려는 상황. 내 모자람과 내 자격지심은
그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지.
"그래서 누구냐고!"
그날 아빠의 목소리는 아직 빠지지 못한 담배연기와 함께
빈 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