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누구냐고!"
그날 아빠의 목소리는 아직 빠지지 못한 담배연기와 함께
빈 차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
"전부.."
"뭐..?"
"언니, 삼촌, 엄마, 이모.. 다 그랬어.. 왜 혼자 떨어져서 그러고 있냐고.."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어. 아니, 할 말을 못 찾았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한 명도 아니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그들에게 나는, 내 모습은, 내 생각은 전혀 상관없고 보려조차 않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던 거지.
"그래서.. 뭐라고들 그러셨다고..?"
"당신 일 그만두고 여기 와서 같이 살자고. 얼른 정리하라고.."
무엇보다 믿었던 삼촌까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게 큰 충격이었지.
항상 날 예뻐해 주시고 믿어 주시던...
삼촌은 항상 내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호리호리한 체격이지만 강렬한 인상.
항상 빡빡 깎은 머리에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부리부리한 눈,
현장에서 오래 일한 탓에 화난 것 같은 큰 목소리와 욕설 섞인 어투.
일하다 사고로 허리를 다치시는 바람에 거동은 조금 불편하시지만
통증 때문에, 통증을 잊기 위해서 술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지만
그게 그분의 전부는 아니었어.
"미진이 재 임신했데. 어휴 속 터져"
결혼 전 처가식구들이 모두 모인 저녁식사.
어머니의 날이 선 말에도
"임신이 왜? 그럼 여자가 임신하지 남자가 임신하냐?
너 어디 조선시대 살다왔냐? 요즘 임신 흉 아니야.
도리 넌 왜 그러고 서있어? 앉아서 술이나 따라봐."
"어휴. 남의 일이라고.."
"너랑 나랑 남이냐? 요즘 애 가져서 결혼하는 거 혼수라더라
너 혼수걱정 덜었다고 자랑하는 거냐?"
결혼 후 에도 처가식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삼촌은 항상
내 편의를 봐주셨어.
"야~ 여기 고기 좀 더 썰어와 봐라. 안주가 부실해"
"제.. 제가.."
"그럼 난 술 누구랑 마셔? 앉어. 너네 요즘 힘들다메?
삼촌 가게 옆에 주유소 있지? 내 이름 대고 기름 만땅 넣고 가~
처음엔 다 그런 거야. 어깨피고. 아 뭐 해 니X 나 잔 비었어?"
그랬던 삼촌조차 지금 내편이 아니다. 그때 그 상실감과
배신감은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지. 이제 정말
내편은 없다는 거잖아?
그 주 금요일 저녁.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처가로 향했어.
3시간.
그때 아빠가 살고 있던 곳에서 처가까지는 약 3시간 정도 걸리는
먼 길이었지.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 3시간 동안 차 안에서 담배를 얼마나 펴댔는지
나중 돼서는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더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담배 하나 더피고 올라갈까 하다가
괜히 또 담배냄새 풀풀 풍기면서 올라가면 욕밖에 더 먹나 싶어
탈취제를 온몸에 도포하듯이 뿌리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지.
/딩동/
"왔나 보다! 누구세요?"
제일 먼저 들린 건 너희들 이모 목소리였어. 곧 문이 열리고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일 거라 생각한 아빠 예상과는 다르게
이모는 활짝 웃고 있었지.
"왔어? 차 많이 막히지? 고생했어 들어가자!"
아직 처가가 많이 어색한데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결코 가볍지 않기에 쭈볏쭈볏 안으로 들어갔지.
"뭐해? 앉아. 야~ 애 밥하고 국 좀 갖다 줘라."
정말 다 모여있었어.
처가이모, 처형, 삼촌...
큰 이모야. 한번 오시려면 5시간 넘게 걸리시니 못 오신걸 테니
제외하면 말야.
삼촌은 거실에 펼쳐진 큰 상에 앉으신 상태로 고개를 돌려 아빠를
쳐다보더니 너무나 당연 하다는 듯이 자리에 앉으라고 하시곤
가족들에게 내가 먹을 음식들은 준비하라고 하셨지.
"제.. 제가.."
"넌 나랑 술 마셔야지 어디가 이 양반아"
평소처럼 억지로 자리에 앉히시는 삼촌.
바쁘게 움직이는 처가 식구들 사이에서 삼촌과 둘이만 앉아있는
상태가 너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
대장 할아버지 기억나니? 너희들이 어렸을 때 삼촌을
대장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사실 나이도 제일 많고
젊었을 때 사고 당하시기 전까지 돈도 많이 모아놓으셔서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처가에 기둥 같은 분이셨거든.
처가 식구들 누구도 삼촌과 척을 지거나 하다못해
언쟁을 벌이는 것조차 꺼릴 정도였지. 물론 아는 것도 많아
언쟁을 벌인다 해도 질 분이 아니셨지만 말야.
"공복? 아니잖아? 회사에서 점심 줄 거 아냐? 한잔해~"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따라주시는 삼촌. 엉덩이가 땅에 닿기가 무섭게
바로 무릎을 꿇어 두 손으로 술을 받고는 간단한 건배와 함께
술을 넘겼어.
갈비찜, 미역국, 잡채, 그리고 맛있어 보이는 반찬들과 안주들.
하지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더라.
얼마나 마셨을까?
살짝 더운 것 같은 느낌이 취기가 오른다는 걸 말해주고 있을 때
삼촌이 입을 뗐어.
"회사는 잘 다니고 있나?"
"네 잘 다니고 있습니다."
"거긴 얼마나 주나? 너 연봉이 얼마나 되냐?"
"그건..."
"왜? 내가 너한테 돈 달랄까 봐? 야~ 나 돈 많아. "
"아니 그게 아니고..."
사람들 많은 곳에서 많지도 않은 내 연봉을 공개하기엔
너무 자존심 상하고 창피해서 회피하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읽은 건지 삼촌은 다른 애기로 말을 돌리셨지.
"그래서 니가 무슨 일 한다고?"
"개발자입니다."
"개발자? 야? 개발자가 뭐냐?"
"그.. 컴퓨터 프로그램 만드는.."
"아~ 프로그래머? 아니 프로그래머라고 하면 되지 무슨 말을
어렵게 해."
"..."
"프로그래머면 내가 아는 놈이 초봉이 3천 정도라던데 알아봐 줄까?"
3천... 정말 아빠한테는 엄청 큰돈이었지.
그 당시 아빠가 받았던 연봉이 2100 정도였거든 그것도 퇴직금 포함.
하지만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있고,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잖니. 경태형만 봐도 상여금에,
천 가까이 연봉인상에..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때 상황에서는
그 말이 전혀 달갑게 들리진 않았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는구나.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는구나.
이 생각뿐이었지.
"아니..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빠의 거절의 말에 아빠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삼촌.
마치 학창 시절에 잘못을 저지르고 가슴 조리며 선생님 앞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손가락은 괜히 메 만지고, 입술은 살짝살짝
떨리는 아빠였어.
"그래? 너 이쪽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다는 거지?"
"지금 맡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어서.."
핑계라고 해야 할까? 변명이라고 해야 할까? 조심스레 아빠
상황을 얘기하려고 하는데 장모님이 갑자기 삼촌옆에 앉으면서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씀하시더라.
"프로젝트는 무슨 프로젝트. 그럼 미진이하고 아기는?
저대로 둘 거야? 일이 중요한가? 가족이 중요하지?"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가족도 지키는 거지..'
라고 입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삼키는 아빠였어.
죄 없는 빈 소주잔만 만지고 있는 아빠에게 삼촌은 소주를
따라주시면서 장모님께 소리를 지르더라.
"아 가만히 있어봐 좀 프로젝트가 있다잖어"
"아 왜 또 나한테 그런데?"
삼촌의 호통에 기분이 상했는지 장모님은 다시 일어나시더니
주방으로 향했어. 귀는 이쪽에 두시고 말이지.
"그래. 그럼 일단 그 프로젝트가 끝나봐야 생각이던 뭐던
할 수 있다는 거 아냐? 맞나?"
"네.."
'생각이고 자시고 난 지금 다니는 곳에서 성공하고 싶어요.'
라고 목까지 올라왔지만 그럴 수 없었어. 분위기가 그러면 안 된다고
아빠에게 말하고 있었거든.
"그럼 얘기 끝났네? 일단 프로젝트가 끝나야 되는 거네? 그게
언제 끝나는데?"
"아직 초기단계라 잘 모르겠습니다."
"서너 달 걸리나? 일단 그럼 너는 끝나는 대로 알려주고.
야~ 술 떨어졌다. 더 가져와."
생각보다 별거 없었어.
술 더 가져오라는 삼촌의 말로 이야기는 끝이 났지.
'뭐야... 이럴 거면 왜 그렇게 무섭게 내려오라고 그랬데?'
하지만 그건 아빠의 착각이었지.
"애 여기 좀 앉아봐라."
술자리가 끝나고 삼촌이 댁으로 돌아가시자마자 장모님은
아빠를 불러 앉히셨어. 잠시 후 이모, 처형, 엄마 모두 자리에
앉았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어.
'아.. 끝난 게 아니었구나..'
모두가 자리에 앉자 장모님의 한숨을 시작으로 대화는 시작됐지.
"하아.. 니들 어쩌려고 그러니 정말"
"..."
"아니 누가 잡아먹어? 애 하고 애엄마 다 여기 있는데 너만 들어오면
되는데 왜 그게 싫다니?"
"프로젝트가.."
"아니 그만두면 상관도 없는 회사 프로젝트가 가족보다 중요한 거야?"
"..."
대화할 생각이 없으셨어. 예나 지금이나 대화라는 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타협점을 찾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장모님은 일방적으로 본인 말씀만 하고 계셨었거든.
그 상황에서 아빠가 뭘 할 수 있었겠니?
그냥 고개 푹 숙인 상태로 듣는 수밖에는 말야.
그때 처형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살짝 웃으며 얘기했어.
"엄마 좀.. 도리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근데 도리야.
여기 있으면 엄마가 애도 봐주고 미진이도 편하지 않을까?"
위해주는 척하면서 결국 같은 소리. 점점 숨이 막혀왔지.
뭔가 먹다 얹힌 거 마냥 가슴이 답답하고 술기운 때문인지
상황 때문인지 머리도 어질어질한 게 아무 생각도 안나더라고.
문득,
엄마를 쳐다봤을 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빠보다 더 주눅 들어 있는 모습에 아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오더라.
"하아.."
"한숨은! 아니 그냥 들어와 살면 되잖아? 누가 나 모시고 살으래니?
니들 먹고살만해지면 다시 나가면 되잖아?"
"이번 프로젝트까지만 끝나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며?"
"최대한 빨리 끝내보겠습니다..."
"어휴 속 터져 진짜."
본인의 가슴을 툭툭 치며 자리를 뜨시는 장모님.
그 뒤를 따라가는 처형.
옆에서 티비를 보며 안 듣는 척하며 다 듣고 있는 이모.
침울한 표정으로 분유를 먹이고 있는 엄마.
그리고,
고개 숙인 채 한숨조차 맘대로 내뱉지 못해 속으로 삼키고
있던 아빠. 그날의 그 장소에서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썩 유쾌하게 남아있진 않단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자려고 하면 장모님의 화난 모습이 떠오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어떤 게 맞는 건가? 왜 내 상황은
아무도 이해를 안 해주는 건가? 왜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던 걸까?
많은 생각들에 잠도 제대로 자기 힘들더라.
그렇게 길고 긴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좋은 아침! 어? 너 얼굴이 왜 그래? 잠못잤어?"
"어.. 좀.."
"와이프 아직 처가에 있다고 했나? 내 친구 상사병 걸린 거 아냐?"
'상사병은 무슨... 지금 처가 때문에 병 걸리게 생겼는데...'
출근길, 회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정현이는 초췌해진
아빠 얼굴을 보더니 걱정 섞인 말을 건냈어. 물론 언제나처럼
수다스럽게 말이지..
"불면증 그거 힘들지. 나도 전에 불면증 때문에 고생한 적 있거든.
잠 안 올 때 좋은 차. 집 어디에 있을 건데 갖다 줄까? 내가 그거 마셨다가
백설공주 될뻔했잖아. 음.. 숲 속의 잠자는 공주가 더 맞으려나?"
"뱃살공주 아니고? 아 좀 시끄러.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좀 다른 데 가서 놀아.."
사무실에 들어설 때까지 계속 옆에서 떠들어대는 정현이 때문에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곧 터져버릴 것 같이 지끈지끈해지자
아무 죄 없는 정현이에게 짜증 내는 아빠였어.
"또 뭐가 그렇게 복잡하냐? 담배 하나 고?"
언제 출근했는지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담배 피러 가자고 말하는
경태형이었지.
"야 담배 있냐? 아씨 있는 줄 알고 안 사 왔는데 없네?"
"아 여기요.. 오늘 출장 간다고 안 했어요?"
"출근도장은 찍고 가야지. 아 귀찮아 죽겠네. 오 땡큐!"
담배를 건네고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아빠를
빤히 쳐다보던 경태형.
"너 이 새끼 주말에 뭐 했어? 얼굴이 반쪽이 됐네?"
'그렇게 티 나나..'
"어? 뭐 했냐? 게임했냐? 술먹었냐?"
"처가 다녀왔습니다."
"아~ 아기 보러~ 아기는 잘 크고?"
"아니..."
경태형에게 아빠는 지난 주말 있었던 얘기를 털어놨어.
처가 식구들이 들어와 살으라고 한다.
아무도 내편이 아니다.
지금 프로젝트 끝나고 생각해 본다고 얘기했지만
나는 여기서 성공하고 싶다.
"이야.. 이제 자리 잡는 애한테 너무하네. 그러니까 잠깐만. 정리하면
처가식구들이 다 때려치고 내려오라는 거 아냐?"
"네 뭐.. 비슷해요.."
"이야..."
그렇게 담배를 다 피고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화장실을 다녀오시던
길인지 팀장님과 마주친 거지.
"도리! 담배 폈냐?"
"아.. 방금 폈습니다."
"그래? 너 도리~ 실력 있는 놈~ 니가 이번 시연회 일등공신인 거 알지?"
"하하.."
"아니야 농담이 아니야. 너 없었으면 어떡할뻔 했냐? 우리 잘해보자 응?
들어가 봐~"
그래,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포기하냐.
아직 보이진 않지만 조금만 더 가면 길이 보일 것 같은데...
잘되면, 그리고 성과를 보여주면 처가식구들도 나를 이해해 주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지난 주말 일들에 대한 걱정은
억지로라도 잠시 넣어두기로 했어.
점심 먹고도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아침부터 눈이 빠질 정도로
원본과 비교하며 열심히 DB작업을 하고 있는데
정현이가 아빠자리로 뛰어오더라.
"야!"
엄청 놀란 표정의 정현이. 그 눈빛에는 놀람과 황당함 그리고 아쉬움까지
모두 녹아있었지.
"깜작야! 뭐야 갑자기?"
깜짝 놀라 괜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정현이에게 물었어.
"너 뭐야? 너 회사 그만둬? 퇴사해?"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서 얼이 빠져있는데
정현이가 비어있는 경태형 자리를 가리키며 말하더라고
"소문났던데? 너 퇴사한다고"
또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안 그래도 복잡한데 앤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짜증이 나다 못해 그냥 다 귀찮아지면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오더라.
"하아.. 또 누가 그런 소릴해.."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와서 나한테 따지는 정현이가
하도 어이 없어서 무시하고 하던일을 마져 하려는데
문득,
뭔가 잊고 있던 게 떠오르면서 퍼즐조각이 하나씩 맞춰지기
시작하는 거야.
그때였어. 멀리서 팀장님의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야! 도리! 와봐!"
"네!"
팀장님 호출소리에 벌떡 일어나 자리까지 불이 나게 뛰어갔더니
팀장님은 날 보자마자 화가 난 목소리로 묻고 있었어.
"야 도리! 너 그만두냐?"
'하아.. 경태형.. 이런 개시X...'
잊고 있었어.. 게시판.. 그것도 가짜정보 가득한..
경태형의 존재를 말야...